염봉남 [廉鳳南, 1875~1936]

염봉남 [廉鳳南, 1875~1936]

장로교 목사, 제17회 장로교 총회장

염봉남 목사(廉鳳南, 1875~1936) 1875년 9월 27일, 경북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12년 대구곡교회의 조사로 부임하였다가 이듬해(1913년) 사임하였다. 그는 이후 안의와(J. E. Adams) 선교사와 인연이 되어 안의와 선교 구역의 조사로 임명을 받고 활동을 하였는데 안의와 선교사는 그의 열심을 인정하고 적극적인 지원을 한 결과 1915년 3월에 장로회신학교에 진학을 하였다.

1919년 6월, 염봉남은 설화교회에서 노회의 허락을 받고 장로로 장립되었다. 이어서 다음해 1920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고, 같은 해 6월에 안동읍교회에서 개최된 제8회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후 그는 부해리 선교사와 동사 목사[선교사 감독 하에 활동하는]로서 달성군의 설화교회, 조암교회, 신당교회, 감삼교회에서 목회하였다.

염봉남 목사와 대구 경산교회

1921년 1월 4일, 경산교회에 부임하였다. 그가 경산교회를 사임한 때가 1923년 1월 6일인데, 그 이전인 1921년에 사월교회에 부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에는 한 목회자가 여러 교회를 맡았던 시절이었다).

이때 대구신정교회 당회에서 염봉남 목사를 청빙하였는데, 염봉남 목사는 자신이 신학교 재학 시절 매월 생활비를 보태주고 가족들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성미까지 지급해 준 경산읍교회를 모른척하고 떠날 수가 없어서 거절을 하였다. 대구신정교회 당회원들이 경산읍교회를 드나드는 것을 눈치챈 경산읍교회의 당회원들은 염봉남 목사를 보다 더 큰 도시에 가서 목회를 할 수 있도록 권유를 하면서 대구 신정교회에 부임할 수 있게 되었다.

염봉남 목사, 제17회 장로회 총회장이 되다

염봉남 목사는 1922년 6월 21일 부임하였고, 7월 26일, 신정교회(서문교회)에서 환영회를 개최하였다. 대구 신정교회에 부임한지 얼마 안 된 염봉남 목사는 1928년 9월 제17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당시 총회는 한국에서 중국에 나가있는 선교사들에게 만 7년이 되면 1년씩 안식년을 주기로 결의를 하였고, 각 노회에 농촌부를 설치하고 ‘농민생활’ 잡지를 발행하는 것을 결의하였다.

1929년 염 목사는 교남기독교청년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1931년에 경산 삼북교회를 돌보았다.

여권문제와 장로교

1934년, 김춘배 목사에 의해 제23회 장로회 총회에서 여권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총회 정치부는 선교사 로버츠(S. L. Robert), 불(W. F. Bull)과 함께 박형룡, 염봉남, 윤하영을 연구위원으로 선임하여 1년간 연구케 하였고, 1935년 9월 제24회 총회에서 보고하도록 하였다. 세 차례에 걸친 연구위원들의 회의를 통해 작성된 보고서는 여성의 종속적 지위를 두 차례 명시하였고, 동시에 여성의 공식석상발언권을 불허하는 것과 교훈, 강도권과 치리권을 금지해야 할 것과, 여성의 천직이 가정임을 분명히 언급하였다.

1935년에 총회는 총회적인 차원에서 신사참배 문제를 논하기 위해 정인과 염봉남, 이인식, 장규명, 곽신근, 이학봉, 오천영을 위원으로 한 연구위원을 임명하였다.

염봉남 목사와 대구신정교회(서문교회)

대구 신정(新町)교회로 전임되어 시무하던 중 1936년 11월 10일(17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염봉남 목사는 1936년 11월 17일 소천하기까지 14년간 대구신정교회(서문교회)에서 시무했다. 염 목사 재직 동안 서문교회는 크게 부흥했다. 부임 당시 교세가 400명 수준이었으나 1933년에는 1,988명으로 양적 성장을 이뤘다. 이 기간 제2예배당을 신축했고, 대신교회를 분립했으며, 창립 25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갖기도 했다. 대구 서문교회는 1959년 장로교가 분열할 때 서문교회(합동)와 대구제이교회(통합)로 나뉘게 된다.

염봉남 목사는 경북노회 유지재단ㆍ대구성경학교ㆍ평양신학교ㆍ숭실전문학교ㆍ계성학교ㆍ신명여학교ㆍ희도보통학교ㆍ명도여학교ㆍ동산병원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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