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찬 [朴禎燦, 1862~1945]

장로교 목사, 박예헌 목사의 부친으로 호는 순산이다.
【기독교 신앙 이전의 삶】
그는 1862년 8월 12일, 평남 평원군 용흥면 안연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면서 어려서 한학과 산서(山書) 등을 수학하였고 농감장의(農監掌議) 등의 관직에 봉직하였다.
30세(1891년) 되던 때, 친족의 족징(族徵 : 조선 후기, 각종 부세나 환곡을 납부하지 못하였거나 납부 대상자가 사망ㆍ도망하여 징수할 곳이 사라진 경우 그 친족에게 대신 징수하는 방식)으로 인하여 경성의 어떤 내관에게 큰 고통을 당한 후 숙천군 보민동 해변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 후로 부친상을 당하고 수년 동안에 걸친 흉년, 청일전쟁 등으로 가산을 파산하기에 이르렀다.
【신앙 입문 후 신학교 입학까지】
을미년(1895년)에 6, 7명의 가족이 괴질에 걸려 유명을 달리하므로 그 비통함이 극에 달하여 있던 중 조문하러 온 외숙 김덕권으로부터 한문신약성서 한 권을 받으면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그의 입신 동기에 대해서는 그가 부친을 체포해 간 관헌을 타살한 후 평양으로 도피했다가 그 곳에서 선교사에게 전도받았다는 설도 있다).
1899년 9월, 마펫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다음해(1900년)부터 영수직급 매서인이 되어 이때 평양 서북지경인 순안ㆍ숙천ㆍ안주ㆍ박천ㆍ영변ㆍ맹산ㆍ강동ㆍ은산ㆍ순천 등지를 무대로 전도활동을 하였다.
1905년에 평양 남문외교회 조사로 시무하였고, 1906년에 장로로 장립되었다. 1907년에는 아들 박예헌과 함께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재학시절 충북 청주읍교회 조사로 시무하였다(1908년).
【목사 안수 이후 활동】
1910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제3회)하고, 동시에 선천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청주읍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충북 내의 최초 조선인 목사라는 영예를 얻었다.
기독교대백과사전에서는 1911년에 서울 남대문교회 초대 목사로 전임되었다고 하는데, 다른 곳(기독일보)에서는 1912년 11월에 남대문교회에 부임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1917년 10월, 함경노회 소속 시베리아 지방 조선 각 교회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가 1919년에 러시아 혁명으로 인하여 귀국하여 경남 마산 문창교회에서 시무하였다.
그는 강우규 열사의 폭탄 투척 사건과 관련하여 체포된 적이 있다.
“1919년 9월 2일 서울역에 도착한 신임 사이또 총독에게 강우규 열사가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박정찬이 원산 예배당과 서울 관철동 신행여관에서 수차 강우규를 만난 사실이 경찰 조사 결과 밝혀짐에 따라 함경남도 원산부 광석동 28번지에서 58세의 나이로 체포되었다. 강우규를 격려하고 지도하였다는 혐의다. 주님을 사랑하면 나라도 겨레도 사랑하게 된다는 공식은 마틴 루터에게서도 나타나듯 먼저 예수, 그리고 게르만 민족이라는 서식에서 조선 민족이 대두될 수 있었던 것이다.” [기독일보 기사 바로가기]
1922년에 경남 마산 문창교회에서 「박정찬 목사 선교 25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1924년에는 다시 노령 서시베리아 지방에 파견되어 1년간 시무하기도 하였다. 1926년 7월 11일, 대구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에 부임하여 1929년 12월 29일까지 약 3년 5개월간 위임목사로 시무하였다.
1929년 원산으로 전임되어 시무하였으며 다시 아들과 함께 간도지방으로 들어가 용정ㆍ길림지방에서 전도하였으며, 해방된 1945년에 길림에서 향년 84세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