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영 [尹河英, 1889~1956]

윤하영 목사


윤하영(尹河英, 1889~1956)은 1889년 8월 31일, 평북 의주군 광평면 상광리에서 윤연석(尹連錫)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의 가족은 1907년 구성으로 이사하였다.

1908년이 되었을 때, 그는 선천(宣川) 주재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 램프(Rev. Henry Willard, Lampe. 남행리)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로 입신(入信)하게 되었다. 그는 램프 선교사의 조선어 교사 겸 조사(助師)가 되어 그와 행동을 같이하였다. 이후 선천고등성경학교에 입학하여 3년동안 수학하였다. 그는 고향인 광평면에 상광교회(上廣敎會)를 세웠고, 그 곳의 조사(助事)로 전도활동을 하였다. 또 두룽붕 가산리교회 등에서 영수(領首)직으로 봉사하기도 하였다.

윤하영은 1915년 8월에 평북노회의 추천을 받아 다음 해 4월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신학생으로 1917년 8월에 정식으로 평북노회(平北老會)로부터 조사에 임명되었다.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고향 의주로 돌아가 3월 15일 광평 장날을 이용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이때 그는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1년 6개월 동안 복역했다. 1921년 출옥한 후 다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들어가 나머지 공부를 한 후 1921년 김관식, 김응진, 이대영 등과 함께 졸업하였다(제14회). 그리고 그해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고 용천군 용계동교회에 부임하여 시무하였다.

1923년에는 같은 군 광화교회(光化敎會, 1905.10.19 설립)와 덕동교회(德洞敎會, 1909.7.12 설립)로부터 공동 초청으로 청빙되어 위임목사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대학에 적을 두고 상해 임시정부를 도와 군자금 모금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1924년에는 신학연구를 위해 미국에 유학, 프린스턴신학교에서 3년간의 신학과정, 2년간의 연구과정을 이수하였다. 귀국 후 1929년 9월 신의주제일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여 이후 14년 동안 이곳에서 목회하였다.

신의주제일교회 목사로 있으면서 1938년 4월 일본천황(日本天皇)의 생일인 천장절에 신사참배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당시 신의주제이교회 한경직(韓京職) 목사와 함께 5월 신의주경찰서 고등계에 검거되어 취조를 받았다. 신사참배 문제가 나왔을 때 그는 노회와 총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는 1939년 장로회 제28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임원교체 뒤 곧바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결성하고 궁성요배 등의 의식을 거행했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은 장로교단의 체계적인 친일 활동을 위해 정인과가 앞장서 결성한 단체로, 정인과는 총간사를 맡고 윤하영은 강제적으로 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11월엔 전국교회에 신사참배(神社參拜)를 열심히 하라는 경고문을 보냈다. 또 총연맹 이사장으로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산하 26개 노회장에게 공문을 보내 각 노회마다 노회지맹(老會支盟)과 각 교회 애국반을 조직하고 보고 하도록 독려했다(친일인명사전 제2권, 민족문제연구소, 2009 서울 초판 p.719 참조.)

1939년 9월부터 1940년 9월까지 장로회 총회연맹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서 온 공문 70여통을 받아 각 노회지맹 이사장들에게 총63회의 통첩문을 보내 연맹의 지시와 통첩에 따르게 했고, 전국 26개 노회 전체에 노회연맹 지회를 조직케 했고, 각 교회에도 730여 개의 애국반을 조직하도록 했다.

1940년 1월이 되자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의 지시에 따라 각 노회지맹(各老會支盟) 이사장과 각 교회 담임자에게 긴급공문을 보내 시국대응(時局對應) 제실시에 관한 보고를 하도록 하였다. 같은 달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본부의 지시로 각 노회지맹 이사장과 각 교회 담임자에게 <기원절 봉축행사에 관한 건>이란 공문을 보내 행사 참여를 독려했다.

다음 2월에도 총회연맹 이사장으로부터 <황군(皇軍)을 위한 위문품을 위한 공고의 건>이라는 공문을 보냈는데, 기한을 정해 금품이나 위문품을 총회연맹 본부로 보내도록 했다. 같은 달 신의주에서 결성된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의산노회(義山老會)지맹 이사를 겸하였다.

같은 해 4월에 이르러는 총회연맹 이사장으로서 각 노회지맹 이사장과 애국반장에게 <“씨”설정계에 관한 건>이라는 공문을 보내 포교자(교회지도자)들의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독려하기에 이른다.

8월에도 각 노회지맹 이사장들에게 <애국반 조직 독촉의 건>이란 공문을 보내 각 교회에 애국반(愛國班)을 조직해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41년 그는 구속되었고 목사직도 박탈당하고 말았다.


그는 교회를 떠나 신의주에서 멀지 않은 백마라는 고을에서 은둔해 있던 중 8ㆍ15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과 함께 다시 신의주제일교회 목사로 복직된 그는 신의주제이교회 한경직 목사 등과 함께 평북의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국 최초의 정당인 「기독교사회민주당」을 1945년 9월에 창당하였다. 각 지방마다 교회를 중심으로 지부를 설치, 민주주의 정부 수립과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사회개혁을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소련군의 진주와 공산당 정권의 득세로 그와 정당에 탄압이 가해지기 시작하여 노동자, 농민을 앞세운 공산당의 폭력에 큰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당시에 ‘기독교사회민주당’이 아니라 ‘사회민주당’이라는 주장도 있다.

☞ 당시 소련군의 활동에 대한 한경직 목사의 비밀 청원서

1946년과 1947년에 충청북도 도지사에 임명이 되었는데, 1948년 11월 하순 무렵 구호물자를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어 1949년 1월 충북지사직을 면직 당했다.

1950년 6월 25일 민족상잔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도쿄(東京) 주재 미군극동사령부(美軍極東司令部) 공보요원(公報要員)으로 근무하다가,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게 되자 귀국해 문교부(文敎部)교과서 편수관으로 잠시 근무하기도 하였다(친일인명사전, 제2권, 같은책 pp.710~711 참조).

1953년 휴전 후에는 교과서 편찬 및 계명협회(啓明協會)의 문맹퇴치 운동에 열중하였는데 1956년 심장병으로 별세하였다. 그의 아들 윤병식(예장 통합)이 목사가 되어 교역의 대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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