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화 [崔載華, 1892~1962]

장로교 목사, 독립운동가, 장로회 제35회 총회장
【출생 이후 결혼까지】
최재화(崔載華, 1892~1962)는 1892년 12월 18일, 경북 선산군 해평면 산양동에서 아버지 최도원(崔道源) 씨와 우서원(禹誓原) 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농사를 짓는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백은(白恩)이다.
선산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1901년으로 미국인 선교사 부해리가 고아면 괴평동에 교회를 설립한 데서 시작된다. 1904년에 선산읍에 교회가 설립되었고, 최재화의 고향 산양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1907년이다. 최재화는 구미에서 온 전도인 서자명(徐子明)을 만나 전도를 받았다.
1909년에 그는 선교사 아담스(J. E. Adams, 安義窩)의 주선으로 서울 경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입학 후 그는 경신학교 교감이던 김규식(金奎植) 선생의 도움으로 게일(Gale) 선교사 집의 보일러실에 석탄을 넣는 일을 하게 되었다. 시골에서 농사도 지었고, 남들보다 기골이 장대했던 최재화에게 이것은 그리 큰일이 아니었다.
20세가 되던 1913년에 최재화 목사는 금산동 김우용 씨의 딸 금심(今心)과 결혼하였다. 학생의 몸이지만 부모가 정혼해 주는 대로 혼인을 하였다. 신부는 김해 김씨 집안으로서 신랑보다 한 살 위였으니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결혼이었다.
【일본 유학을 시도하다】
1914년 서울 경신학교를 졸업하였고, 졸업 후 진주 심상소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1년간 교육에 종사하였다.
1915년 가을, 해외유학의 길에 올라 중국 상해로 갔으나 정세불안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이듬해인 1916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닛폰(日本)대학 법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되어 1918년 봄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3ㆍ1운동에 참여하다】
귀국 후 언더우드의 초청을 받아 경신학교 교사로 취임하여 봉직하던 중 3ㆍ1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3ㆍ1운동 이전에 동창인 이갑성(李甲成)과 연락을 취하면서 경신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지도하였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이용상(李龍相)과 함께 영남 지방 만세운동 책임을 지고 대구로 내려갔다. 그는 대구 제일교회 이만집 목사와 김태련 조사를 만나 대구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3월 8일 학생 시민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이 일로 이만집 목사와 김태련 조사는 현장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였다. 3월 10일 밤 그는 고향인 선산으로 탈출하여 박진오(朴鎭五) 등 동지를 규합, 4월 3일 해평 장날을 기해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벌였다. 4월 3일 밤 11시 30분경 산양리ㆍ송곡리ㆍ금호리의 주민들 60~70명을 이끌고 해평주재소 앞에서 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이때 일본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투석으로 이에 맞섰다. 그러자 일본 경찰은 공포를 쏘아대며 선산경찰서에 지원을 요청하여, 선산에서 경찰부장 이하 6명, 대구(大邱)의 일본 헌병이 오장 이하 3명, 상주(尙州)의 일본군 수비대 11명이 몰려와 시위군중 55명을 체포하였다. 4월 17일 김수길(金壽吉)ㆍ이영식(李永植, 고 이태영 대구대 총장의 아버지)ㆍ이종헌(李鍾憲)ㆍ이수건(李壽鍵)ㆍ이덕생(李德生)ㆍ이영옥(李榮玉) 등 계성학교 학생들 및 이명건(李命健, 화가 이쾌대의 형)ㆍ이종식(李鍾植)과 함께 독립운동 방법을 전환하기로 결의한 뒤 비밀결사 혜성단을 결성하였다.
최재화를 비롯한 혜성단원들은 4월 18일 「근고아동포(謹告我同胞)」, 4월 27일 「경아동포(警我同胞)」, 5월 7일 「경고관공리동포(警告官公吏同胞)」 등을 배포하였으며, 민족 자산가들에게는 독립운동 자금 헌금을 호소하였다. 상인들에게는 폐점 철시 및 일본인과의 거래 중지, 노동자들에게는 파업을 통한 독립운동 참가를 촉구하였다. 또한 대구경찰서장과 친일 인사들에게 암살 협박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5월 14일 김수길이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면서 혜성단의 실체가 드러나 단원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최재화는 이때 체포되지 않아 7월 1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열린 궐석재판에서 「출판법」 위반,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협박 및 사문서 위조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았다.
【체포와 탈출, 그리고 망명】
그는 일경의 눈을 피해 다니다가 그해 6월 만주의 독립운동단체인 서로군정서와 연락을 취하며 신흥무관학교 생도모집의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는 성서공회 권서 배승환(裵昇煥) 및 김두칠(金斗七)ㆍ강수남(康壽男)을 포섭, 이들을 통해 무관학교 지원자들을 모집하여 만주로 보냈다. 그는 최재하(崔在河)ㆍ최동수(崔東秀)ㆍ공동수(孔東秀)ㆍ최동철(崔東哲)ㆍ최덕규(崔德奎)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1920년 그의 활동이 일경에 탄로되어 체포령이 내려졌고 그는 감시망을 피해 서울, 김천을 전전하다 결국은 상주에서 체포되었다. 7월 상주에서 소위 제령 제 7호(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및 사기죄로 체포되어 대구로 호송 도중 다시 탈주하였다. 일제는 12월 22일 대구복심법원의 궐석재판에서 그에게 징역 8년형을 확정하고 그를 다시 체포하기에 혈안이 되었으나 그는 이해 7월, 일본을 거쳐 중국 북경(北京)으로 탈출하였다.
1921년 2월, 그는 궐석재판에서 징역 3년의 선고를 받았으며 앞서 대구에서 벌인 경고문 발송 사건도 궐석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8년의 선고를 받았다. 중국에 건너간 그는 경신학교 시절 교사였던 김규식을 만났으며 항일 무력투쟁을 추구하는 의열단과 관련을 맺으며 무력시위를 전개하였다. 그곳에서 교민단 대표로 상해 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의 최고 정치회의에 최연소자로 참석하여 안창호(安昌浩) 등과 조국 광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화북신학교에서 공부하다】
1922년 의열단이 공산당에게서 자금을 얻게 된 것을 계기로 의열단과 결별한 후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목회자로서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고 산동에 있는 화북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최재화는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남경에 있는 금릉신학교를 찾아가 입학하였다. 그러나 생활비와 학비가 없는 상황에서 신학공부를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근근히 주변의 도움으로 공부하던 중 최재화는 좋은 조건으로 화북신학교로 전학하게 되었다. 산동성 화북신학교 부교장으로 전임하는 가옥명 교수가 주선하여 전액 장학금을 받고 전학하게 되었는데 이때가 1922년 9월이었다.
화북신학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경영하는 학교로서 보수적인 신학사상을 가르치고 있었다. 교수진은 당대의 유명한 신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학생들도 가족과 같은 분위기였다. 화북신학교의 한국인 학생은 최재화와 김경화 두 사람뿐이었다. 둘 다 남경의 금릉신학교를 다니다가 전학 온 학생들로서 나이도 동갑이어서 그들은 형제같이 지냈다.
【만주에서 사역하다】
최재화는 1924년 12월에 화북신학교를 졸업하였다(1926년에 졸업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24명의 졸업생 중 한국인은 김경하와 최재화 두 명이었다. 산동성의 화북신학교를 졸업한 최재화는 새로운 사역의 길을 찾아야 했다. 형제처럼 지내던 김경하는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나 최재화는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김경하는 3.1독립운동으로 체포되어 신의주 지방법원과 평양복심법원에서 2년 6개월의 징역 언도를 받은 바 있다. 최재화는 궐석재판에서 도합 8년의 언도를 받고 중국으로 탈출한 상태였다.
당시 일본 형법에는 2년 6개월의 징역 언도를 받고서 형 집행을 받지 않은 자는 만 5년만 지나면 시효가 없어지기에 김경하는 귀국할 수 있었다. 8년 이상의 징역을 받은 자는 13년이 지나야 시효가 없어지기에 최재화는 앞으로 7년이 더 지나야 귀국할 수 있었다. 졸업 후 산동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산동성 다의강(多義講)교회 목사로 부임하여 3년간 봉직하였다. 1928년 길림성 흥원진(興源鎭)교회로 전임하여 시무하였다.
【귀국하여 대구제일교회로】
1931년 봄, 최재화는 만주를 떠나 고국행 기차를 탔다. 중국에서 사용하던 이름인 최묵을 버리고 최재화로 다시 돌아왔다. 귀국 즉시 대구 제일교회에 부임하였다. 1931년 4월 20일 주일에 첫 부임설교를 하였는데 ‘하나님을 바라며 영광을 돌릴 자’라는 주제의 설교였다. 10년 동안 자치파에 예배당을 빼앗기고 그동안 YMCA나 회도 학교를 빌려 예배를 드리다가 1931년 11월 15일 주일에는 교회당 명도소송에 승소 판결대로 원예배당에 들어가 입당예배를 감격 속에 드리게 되었다. 그는 1932년 2월 26일부터 일주일 동안 김익두 목사를 강사로 모시고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기도와 눈물로 지은 교회당은 1933년 9월 말에 붉은 벽돌 2층 건물, 연건평 448평의 웅장한 모습으로 그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였다. 1933년 10월 8일 오전 11시에 신축예배당 입당예배가 드러졌는데 예배당에는 모두 3,500여 명의 교우들이 참예하였다. 이렇게 지은 예배당은 경북지방의 문화재로서 시간이 지날수록 역사적 가치를 더하였고, 어려움을 딛고 일어난 제일교회의 위상은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당시 대구 제일교회는 이만집 목사를 중심한 자치파 교인과의 분쟁으로 큰 시련을 겪은 후였는데, 그가 부임하면서 교회신축 등 활기찬 목회활동을 전개해 오랜 분규의 상처가 아물게 되었다.
최재화는 대구제일교회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꿈꾸었다. 그중 가장 관심을 가진 부분은 인재양성이었다. 계성학교와 신명여학교는 제일교회와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최재화는 그 학교에서 설교할 때가 많았고, 학생들도 교회에 많이 출석하였다.
그는 계성학교 출신자들 가운데 소명 받은 학생들을 일본에 유학시켰고, 그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신앙지도를 하였다. 그 대표적인 학생이 훗날, 한신대학 학장을 한 이여진과 부산대학교 총장을 한 조민하이다. 최재화는 1931년 10월 20일에 대구제일교회에 부임하여 1942년 12월 31일에 사임하였으니 근 11년간 시무한 셈이다.
1942년 부산진교회로 전임하였으나 일경의 감시와 방해로 어려운 목회를 꾸려나갔다.
【해방 이후 1948년까지】
1945년, 해방 이후 한국 정치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의 삼 영수가 주도하고 있었는데 최재화의 경우를 보면 김규식의 제자요, 김구의 경호원이었으니 자연히 김구 계열 즉 임시정부 계열로 분류되었다.
1948년 5월 10일에 제헌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각 지방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이 국회에 가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 고향 선산의 유지들이 그를 찾아와 국회의원 출마를 강력히 요청하였다.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그들의 요청에 따라 국회의원에 출마하였다. 최재화는 김구파로 몰렸고, 김규식의 제자임을 상대편이 공격하였다. 결국 낙선하고 말았다.
1948년 7월 1일, 대구서남교회에 부임하였다(제7대 담임목사). 최재화가 서남교회에 부임하였을 때에 대구제일교회는 한병혁 목사가 시무하고 있었다. 최재화가 만주에서 목회할 때에 처음 얻은 열매이며, 화북신학교에 보내어 목회의 길을 가게 한 믿음의 아들이 자신이 시무했던 교회의 목사로 시무하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알 수 없었다.
【1949년 제35회 총회장】
1949년 4월 9일, 서울 새문안교회당에서 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5회 총회에서 최재화는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그가 총회장으로 있는 동안 조선신학교측의 교회가 분열하여 기독교장로회를 구성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에 대하여 김남식 박사는 최재화 목사가 김재준을 척결(?)한 인물로 설명한다.
1950년 9월에 모이기로 한 제36회 속회 총회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모이지 못하고 1951년 5월 25일에 피난지 부산중앙교회당에서 회집되어 권연호 목사를 총회장으로 뽑아 회무를 인계하였다. 그러니 최재화는 비상정회와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총회장을 2년간 담당하는 진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1953년 6월 11일, 당시 계성학교 신태식 교장실에서 안두화, 최재화, 신태식, 김광수 제씨가 모여 기성회 조직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최재화가 기성회 회장이 되어 기독교 대학 설립에 착수하였다.
【계명대학 설립】
1954년 4월 ‘사설학술강습회 계명기독학관’을 개교하였으니 이것이 오늘날의 계명대학교의 시작이다. 최재화는 안두화 선교사와 함께 기성회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설립이사로서 학교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1955년 아담스(安斗華)ㆍ신태식ㆍ김광수 등과 계명대학을 설립하였다. 1955년 계명기독대학이 설립되었을 때 대학재단법인의 초대 설립 이사가 되었다.
최재화는 신학교육에 관심을 가져 대구장로회신학교(현, 대신대학교) 설립에 관여하였고, 1956년에는 이사장으로 섬겼다. 1956년 7월 12일에 대구장로회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는데 이 기간 중의 가장 큰 공적은 1957년 3월 21일자로 문교부장관으로부터 각종학교 인가를 받은 일이다.
1958년 9월 18일 초대 이사장 안두화 선교사가 제2대 학장으로 취임하자 최재화는 제2대 이사장에 취임하여 1959년 2월 23일까지 학교를 위해 봉사하였다. 계명대학교의 설립 및 발전에 대한 공적을 기려 성서캠퍼스의 자연과학대학 건물을 최재화 목사의 아호를 따서 ‘백은관’이라 지었다.
【합동측 목사, 그리고 마무리】
그는 장로교회가 또 다시 WCC측(통합), NAE측(합동)으로 나뉠 때 그는 합동측에 속하게 되었다.
1959년에 대구 서남교회를 사임하고 구미 안동교회에 부임하였다(1961년까지 시무). 이후 은퇴하여 고향인 산양에 머물러 있던 중 위암으로 1962년 9월 17일 별세하였다. 그의 장례예배는 서현교회당에서 경북노회장인 황철도 목사의 집례로 드려졌고, 고향 선산 산양 뒷산에 안장되었다.
1963년 「백은 최재화 선생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1966년 고향인 선산에 「백은 최재화 선생기념비」가 건립되었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공로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유족으로는 3남이 있는데 성탁(聖卓)은 목사가 되어 목회의 대를 이었고 성근(聖謹, 재미), 성구(聖邱, 의사)는 장로로 봉직하였다.
[최재화 목사에 대한 기사 링크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