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1』 제1장 : 로마의 탄생

『로마인 이야기 1』 제1장 : 로마의 탄생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역사는 학자들이 말하는 만큼 어려운 것도 아니고 케케묵은 것도 아닙니다. 다만 자신들이 태어난 시대를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은 그 자체로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을 앎으로써 지금 현재를 열심히 살려고 하는 우리에게도 생각을 위한 힌트나 재료를 주게 됩니다. [11]

적잖은 사료가 보여주고 있듯이,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지는 것이
로마인이라고, 로마인들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만이 그토록 번영할 수 있었을까요. 커다란 문명권을 형성하고 오랫동안 그것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14-15]

【프롤로그】

연작의 제1권인 이 책에서는 로마 건국부터 시작하여 제1차 포에니 전쟁 직전까지의 500년을 다룰 작정이다. 이것은 로마에 고난이 끊이지 않았던 기나긴 세월에 대한 이야기다. 이때의 로마는 순조로웠던 시기에도 일보 전진과 반보 후퇴를 거듭했고, 잘못하면 10보나 20보씩 후퇴하여 원래 위치로 돌아가는 데 수십 년이 걸리곤 했다. 그러나 나중에 로마가 번성한 요인은 대부분 이 500년 동안 싹이 터서 자랐다. 어린 시절에 축적된 경험과 지혜가 나중에 어른이 되어 자립했을 때 비로소 진가를 발휘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22]

【제1장 로마의 탄생】

[유민의 전설] 25

예로부터 로마인은 기원전 753년에 로마를 건국한 것은 로물루스이고, 그 로물루스는 트로이에서 도망쳐 나온 아이네아스의 자손이라고 믿었다. [27]

[기원전 8세기의 이탈리아] 29

도시 건설에 나타난 사고 방식의 차이가 이 세 민족의 이후의 운명을 좌우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방어에는 완벽하지만, 발전을 저해받기 쉬운 언덕을 좋아한 에트루리아인.
방어가 불완전한 곳에 도시를 건설한 덕분에 결과적으로 밖을 향해 발전하게 된 로마인.
통상에는 편리하지만, 자칫하면 적의 존재를 잊게 만드는 바닷가에 도시를 세운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인. [31]

[에트루리아인] 32

에트루리아인은 티레니아 해의 재해권을 둘러싸고 카르타고 및 그리스와 격전을 벌인 일도 있다. 산 사람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풍습도 있었다. 고대 로마인은 사람과 맹수가 싸우는 것을 보면서 열광했지만, 이 구경거리도 원래는 에트루리아인이 즐긴 경기였다… 그들은 기술력을 자랑할 정도로 근면했고, 그런 면에서 진취적인 기질은 단연 뛰어났다. 이런 에트루리아인이 로마인에게 미친 영향은 많은 점에서 헤아릴 수 없이 크다. [34]

[이탈리아의 그리스인] 34

남부 이탈리아로 이주한 그리스인은 또 한 가지 점에서도 역시 그리스인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지만, 단결심과는 인연이 멀었다. ‘대 그리스’의 여러 도시들도 서로 힘을 합하여 공동으로 싸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38]

갓 태어난 로마가 북부의 에트루리아와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라는 양대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에트루리아인과 그리스인이 로마의 독립을 존중해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로마에는 에트루리아인과 그리스인이 자기네 세력권 안에 넣고 싶어할 만한 매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38]

[건국의 왕 로물루스] 40

일곱 언덕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퀴리날리스(이탈리아어로는 퀴리날레), 비미날리스(비미날레), 에스퀼리누스(에스퀼리노), 카피톨리누스(카피톨리노), 팔라티누스(팔라티노), 카일리우스(첼리오), 아벤티누스(아벤티노)로 내려온다. 언덕과 언덕 사이의 평지는 아직 습지였다. [40]

레무스가 죽고 유일한 왕이 된 로물루스는 우선 팔라티누스 언덕 주위에 성벽을 쌓았다.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의사 표시다. 신들에게 산제물을 바치는 의식도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그날은 기원전 753년 4월 21일이었다고 한다. 이 로마 건국기념일은 그후 2천 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끊이지 않고 해마다 축하되는 명절이 되었다. [41]

원로원 의원들은 아버지를 의미하는 ‘파테르’라고 불렸다. 건국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이 낱말에서 귀족을 뜻하는‘파트리키’라는 낱말이 생겨났다. [42]

로물루스는 사비니족에게 서로 세력권을 존중하여 공존하는 형태의 화평이 아니라 두 부족이 하나로 합치는 형태의 화평을 제안했다. 부족 전체가 로마로 이주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일곱 언덕 가운데 하나인 퀴리날리스 언덕을 사비니족의 주거지로 제공했다. [45]

풀루타르코스는 『영웅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패자조차도 자기들에게 동화시키는 이 방식만큼 로마의 강대화에 이바지한 것은 없다.” [46]

[제2대 왕 누마] 47

알맞은 시기에 알맞은 인재가 알맞은 자리에 등용되어 능력을 발휘하는 예는 민족 융성기에는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47]

로마의 왕은 신의 뜻을 나타내는 존재가 아니다. 공동체의 뜻을 구현하고, 그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존재다. 죽을 때까지 왕위에 앉기는 하지만, 왕위를 세습하지도 않는다. 또한 선거를 통해 뽑힌다. 로물루스한테도 아들이 있었지만, 그 아들이 후계자가 된다는 것은 당시 로마에서는 생각조차 못한 일이었다. 로마의 왕은 군주라기보다는 오히려 종신 대통령에 가까웠다. [48]

역사가 리비우스는 『로마사』에서 누마의 업적을 소개할 때,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왕위에 오른 누마는 법과 풍습을 개선하여, 그때까지 폭력과 전쟁으로 기초를 쌓은 로마에 건전함을 주고자 했다.” [48]

누마는 출입문의 수호신이며 전쟁의 신이기도 한 야누스에게 바치는 신전을 지었다. 야누스 신은 입구와 출구라는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반대방향을 향한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모습으로 표현된다. 누마는 완성된 야누스 신전의 앞문과 뒷문을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이 문은 전시에는 열리고 평화시에는 닫힌다고 말했다. 누마가 로마를 다스린 43년 동안, 이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49]

로마인은 신에게 자기네 윤리도덕을 바로잡는 역할을 요구하지 않는 대신 무엇을 요구했을까. 그것은 바로 수호신 역할이다. 수호를 요구한 것이다. [54]

유대교보다는 유연성이 풍부한 기독교, 특히 가톨릭 교회가 이 점에 주목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일신교다. 그래서 수호신의 역할은 성자들이 대신 맡게 되었다… 기독교에서는 ‘수호신’이라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수호성인’이라고 불렀다. [56]

역사가 디오니시오스는 『고대 로마사』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로마를 강대하게 한 요인은 종교에 관한 사고방식이었다.”

로마인에게 종교는 지도원리가 아니라 버팀대에 불과했기 때문에 종교를 믿음으로써 인간성까지 속박당하는 일도 없었다… 디오니시오스에 따르면, 광신적이 아니기 때문에 배타적이지도 않고 폐쇄적이지도 않은 로마인이 종교는 이교도나 이단이라는 개념과도 거리가 말었다. 로마인은 전쟁을 하긴 했지만, 종교전쟁은 하지 않았다. [57-58]

인간의 행동 원칙을 바로잡는 역할을,
종교에 맡긴 유대인.
철학에 맡긴 그리스인
법률에 맡긴 로마인.
이것만 보아도 이 세 민족의 특징이 떠오를 정도다. [59]

[제3대 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60

알바롱가 시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주민들은 로마로 강제 이주당했다. 하지만 노예로서가 아니라 로마 시민으로서였다. 로마인과 동등한 시민권을 부여받은 이들의 주거지로 카일리우스(첼리오) 언덕이 할당되었다. 퀸틸리우스, 세르비우스, 율리우스 같은 알바롱가의 유력한 가문은 로마 귀족이 되었고, 그 대표자한테는 원로원 의석이 제공되었다. 만약 이때 알바롱가 백성이 몰살당했거나 노예가 되었다면, 나중에 율리우스 가문에서 태어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62]

로마인은 전쟁에 패한 민족을 로마에 동화시키는 로물루스 시대 이래의 노선을 계승하면서도,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배신행위를 저지른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노선도 확립했다. [62]

[제4대 왕 안쿠스 마르티우스] 63

툴루스가 죽은 뒤에 선출된 제4대 왕은 사비니족 출신의 안쿠스 마르티우스라는 자였다. 그는 누마의 외손자로 로마에서 태어나 자랐다. 외할아버지 누마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다섯 살이었다니까, 왕위에 올랐을 때는 서른일곱 살이었다. [63]

제4대 왕 안쿠스는 25년에 걸친 치세 동안 전투 외에도 몇 가지 사업을 완수했다… 첫째는 테베레 강에 처음으로 다리를 놓은 것이다… 두 번째 사업은 테베레 강 어귀에 있는 오스티아를 정복한 것이다. 오스티아를 정복함으로써 로마는 비로소 지중해와 마주보게 되었다. [65]

[최초로 선거운동을 한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66

타르퀴니우스의 간척사업은 활용할 수 있는 토지를 늘렸을 뿐만 아니라, 민족 공동체 사이에 교류가 활발해짐으로써 로마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에도 이바지했다… 로마인은 에트루리아 기술자들의 지도를 받고 일하면서, 그 기술을 배우고 익혔다. 이것이 나중에 세계적인 토목 기술자들을 키워내는 기초가 되었다. 타르퀴니우스가 도입한 에트루리아 기술로 변모한 로마 시가지를 보고, 원래 농경민족인 로마인은 기술력에 눈을 뜨게 되었다. [70-71]

[제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72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이룩한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군제 개혁일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군제 개혁인 동시에 세제 개혁이자, 선거제도의 개혁이기도 했다. [74]

[마지막 왕 ‘거만한 타르퀴니우스’] 78

국내에서는 독재적 전제군주인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거만한 타르퀴니우스)도 군사적 재능은 뛰어났다. 주변 부족들과의 전투에서도 이기는 것은 늘 로마 쪽이었다. 화친과 전쟁의 양면 정책을 구사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가는 그의 방식은 교묘했지만 음험하기도 했다. [80]

로마의 일곱 왕의 역사는 알맞은 시기에 알맞은 인재를 알맞은 자리에 등용한다는 원칙이 지나칠 만큼 완벽하게 적용된 역사였다. 로마는 이런 왕들 덕택에 튼튼한 뿌리를 땅속 깊이 내릴 수 있었다.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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