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연호 [權連鎬, 1898~1980]


권연호(權連鎬, 1898~1980)는 1898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출생하였다. 김린서 목사는 “권연호 목사는 이조판서 준(俊)의 증손으로 예수 믿는다는 죄명하에 안동 권씨 족보에서 할명(割名)되었다가 이지음 복보(復譜)되었다”고 썼다(신앙생활지 1954년 5,6월호).

권연호 목사가 처음 기독교를 접한 것은 1908~1910년쯤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안동지역 최초 교인으로 국곡교회를 세운 권수백 조사(1923년 장로)가 1908년 사랑방 사숙을 개설하고 강낙원을 교사로 초빙하여 신교육을 시작하였는데 그때의 제자로 이 지역의 유명한 목사 권연호씨가 있다고 하였다.

국곡교회와 같은 일직면 경내의 장사리교회의 연혁에는 1910년 창립교인으로 권건호, 권연호, 이도일, 이장윤, 이부돌, 이삼돌, 이태술 제씨가 삼일기도회와 주일 저녁예배를 드렸다 하였다. 장사리교회에서 1912년 권연호 씨가 교회학교를 설립하였다.


권연호는 고향을 떠나 상경하여 경성사범학고 구기과(球技科)를 1914년에 졸업하고 잠시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 안의와 선교사를 만나 객지생활에서 일시 중단되었던 신앙을 되찾아 안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1916년에는 사범학교를 마친 그는 평양에 올라가서 숭실학교에 입학하였고 함일돈 선교사 댁에서 고학하며 공부하였다. 당시의 급우로는 유명한 음악인이 된 현재명 교수와 기미년 대구만세운동 관여로 2년 언도를 받았던 김무생 목사가 있다. 1919년,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수료하고 그해부터 교원으로 봉직하였다.

1921년 2월 5일, 안동주재 안대선 선교사가 안동읍교회에서 면려청년회(Christian Endeavor Society)를 정식으로 설립할 당시 그가 실제적으로 C.E운동의 리더 역할을 담당하였다(기독신문 2009년 6월 24일, 〈340〉 문소재에서).


1923년부터 기양(岐陽)교회 전도사로 교역생활을 시작한 그는 1936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제31회). 그리고 기양교회가 속한 평서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해 그는 평양 숭실전문학교 이사로 취임하였다.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철산읍교회 목사로 시무하였다(1937~1940년). 1940년에 만주신학교 이사를 지내며 안주의 안동교회 목사로 시무하였다(1940~1945년).


1945년 해방 후, 귀국하여 미군정청 시절에 군정장관 리치 장군에서 형무소 전도할 수 있는 형목제도를 허락받아 교정선교의 선구자가 되었다.

1946년부터 서울 창신교회 목사로 23년간 시무하였다(1946~1969년). 1947년에 300만 구령운동의 일환으로 박신출 장로의 삼각산 제일기도원에서 박재봉, 김치선, 권연호 목사 등이 부흥집회를 가졌으며 이는 기도원 운동의 큰 자극이 되었다.

1948년에는 서울 장로회신학교 이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이때 주일선거에 반대하여 평일로 시정했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이 대한민국이 태동하는 최초의 총선일자를 주일인 1948년 5월 9일로 결정하여 공포했다. 이에 마음이 아팠던 권 목사는 하지 중장을 방문하여 항의했다. 하지 중장은 이승만 박사에게 상의하라고 했다. 이승만 박사와 의논하여 5월 10일로 연기하게 되었다.


1951년 제36회 장로교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이때 제27회 총회에서의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는 발의를 하여 통과시켰다. 물론 남부총회에서 이런 결의가 있었지만 그것은 반쪽 총회였고 허술하였던 관계로 재결의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해 그는 기독공보사 사장에 취임하였다.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는 ‘기독교 선거대책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정치에 관여했다. 1952년 8월 5일자 기독공보 기사는 다음과 같다.
“지난 26일 ‘한국기독교연합회’에서는 회장 전필순 명의로 장,감,성,구(長,監,聖,救) 각 교화 각 단체 대표자의 회합을 요청하여 다음과 같이 회를 결성하고 위원장 권연호 목사 사회하에 대통령으로 이승만 박사를 추대키로 만장일치 가결하고 이 뜻을 전국에 공포하기로 결의하였다. 위원장 : 권연호, 사무장 : 김종대, 서기 : 안창기, 위원 : 전필순, 김상권, 노진현, 김수철, 김광우, 맹기영, 황종률”

1954년 연세대학교 이사로 활동하였고, 1955년에 재단법인 창신모자원의 이사장을 지냈다. 그는 장로교회 분열을 막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군종제도 창설의 산파역할을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과의 두터운 친분으로 국민의례에 관한 의식 제정의 문제 등을 기독교계를 대표하여, 타협하는 등의 공헌을 하였다.

1968년 김치선 목사(창동교회)가 별세하여 그가 설립한 대한신학교 강당에서 장례식을 할 때 권연호 목사가 집례하였다.


1969년 7월 17일, 창신교회 원로 목사로 추대되었다.

퇴임후 권 목사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구정숙 사모와 여생을 보내되 거리에서나 공원 등을 찾아 전도하는 일을 하였다. 이에 대구 서현교회(당시 김수학 목사 담임)에서 그를 1977년에 미국 주재 명예선교사로 파송했다. 이후 1980년 1월, 미국에서 별세하였다.


권연호 목사와 박태선과의 관계는 아픔이요 상처였다. 창신교회에서 성장한 ‘열방을 섬기는 사람들’의 양국주 국제대표는 한 기고문에서 자기가 입교문답할 때 권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평생에 주님께 드리는 기도 가운데 하나는 내가 장로교 총회장으로 봉사하던 연장선산에서 박태선 장로의 신앙간증집회를 남산에서 열었다. 그때 큰 역사가 일어났는데, 그 집회 이후에 박장로가 감람나무로 돌변하였다. 내가 박장로를 교만하게 만들었고 이단이 되게 하였노라’고 했다는 증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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