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1년(BC. 57) 4월 15일 : 시조 혁거세가 즉위하다
시조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1
시조의 성은 박(朴)이고2,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3. 전한 효선제(孝宣帝)4 오봉(五鳳) 원년(B.C. 57) 갑자년(甲子年) 4월 병진일(丙辰日)[일설에는 정월 15일이라고도 한다]에 즉위하여 호칭을 거서간(居西干)5이라고 하니, 이때 나이가 13세였다. 나라 이름은 서나벌(徐那伐)6이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6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는데,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7,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8,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9[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10,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11,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12으로, 이들이 바로 진한(辰韓)의 6부이다.
고허촌의 우두머리인 소벌공(蘇伐公)13이 양산의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14 옆 숲속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부짖고 있었다. 그래서 가서 살펴보니 홀연히 말은 보이지 않고, 단지 큰 알이 있었다. 알을 깨뜨리니 어린아이가 나왔다. 이에 거두어서 길렀는데, 나이 십여 세가 되자 쑥쑥 커서 남들보다 일찍 성인의 모습을 갖추었다. 6부의 사람들이 그 탄생이 신비롭고 기이하다고 하여 떠받들었는데, 이때 이르러 임금으로 세운 것이다.
진한 사람들이 표주박[瓠]을 일컬어 ‘박’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에 큰 알이 표주박처럼 생겼으므로, 이로 인해 ‘박’을 성으로 삼았다. 거서간은 진한 말로 ‘왕’이라는 뜻이다. [혹은 귀인을 부르는 칭호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4년(BC. 54) 4월 : 일식이 일어나다
4년(B.C. 54) 여름 4월 신축(辛丑) 초하루에 일식(日食)이 있었다.15
【삼국사기】 5년(BC. 53) 1월 : 알영이 태어나다
5년(B.C. 53) 봄 정월에 용이 알영정(閼英井)16에 나타났다.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는데17, 노구(老嫗)18가 보고서 기이하게 여겨 거두어 길렀다.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성장하면서 덕행과 용모가 빼어나니, 시조가 그 소식을 듣고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행실이 어질고 내조를 잘하여 이때 사람들이 그들을 두 성인(聖人)이라고 일컬었다.
【삼국사기】 8년(BC. 50) : 왜인이 변경을 침략하다
8년(B.C. 50)에 왜인(倭人)이 병사를 일으켜 변경을 침범하려 했는데19, 시조가 신령한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되돌아갔다.
【삼국사기】 9년(BC. 49) 3월 : 살별이 나타나다
9년(B.C. 49) 봄 3월에 살별[星孛]20이 왕량(王良) 자리21에서 나타났다.
【삼국사기】 14년(BC. 44) 4월 : 살별이 나타나다
14년(B.C. 44) 여름 4월에 살별[星孛]이 삼(參) 자리22에서 나타났다.
【삼국사기】 17년(BC. 41) : 6부를 순행하다
17년(B.C. 41)에 왕이 6부(六部)를 돌면서 백성들을 살폈는데, 왕비 알영(閼英)23도 왕을 따라갔다. 농사와 양잠을 권하고 독려하여 땅이 주는 이로움을 다 얻도록 하였다.
【삼국사기】 19년(BC. 39) 1월 : 변한이 항복하다
19년(B.C. 39) 봄 정월에 변한(卞韓)24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
【삼국사기】 21년(BC. 37) : 금성을 축조하다
21년(B.C. 37)에 수도에 성을 쌓고 금성(金城)이라고 불렀다.
【삼국사기】 21년(BC. 37) : 고구려 시조가 즉위하다
이 해(B.C. 37)에 고구려의 시조 동명(東明)이 왕이 되었다.
【삼국사기】 24년(BC. 34) 6월 : 일식이 일어나다
24년(B.C. 34) 여름 6월 임신(壬申) 그믐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삼국사기】 26년(BC. 32) 1월 : 금성에 궁실을 짓다
26년(B.C. 32) 봄 정월에 금성(金城)에 궁실을 지었다.
【삼국사기】 28년(BC. 28) 4월 : 일식이 일어나다
30년(B.C. 28) 여름 4월 기해(己亥) 그믐에 일식(日食)이 있었다.25
【삼국사기】 30년(BC. 28) : 낙랑이 침략하다
〔30년(B.C. 28)〕 낙랑인(樂浪人)26이 병사를 이끌고 침략해 왔다. 변경 사람들이 밤에 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 곡식도 한데에 쌓아 들판에 널린 것을 보고서 서로 말하기를, “이곳의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가히 도(道)가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군사를 몰래 내어 습격하는 것은 도적이나 다를 바 없으니 부끄럽지 않겠는가?”라고 하며 병사를 물려서 돌아갔다.
【삼국사기】 32년(BC. 26) 8월 : 일식이 일어나다
32년(B.C. 26) 가을 8월 을묘(乙卯) 그믐에 일식(日食)이 있었다.27
【삼국사기】 38년(BC. 20) 2월 : 호공이 마한에 사신으로 가다
38년(B.C. 20) 봄 2월에 호공(瓠公)28으로 하여금 마한(馬韓)을 방문하게 하였다. 마한왕이 호공에게 꾸짖어 말하기를,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은 우리의 속국이거늘 근래 직분에 맞는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사대의 예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호공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는 두 성인이 나라를 열고 일으킨 이래 인사가 잘 갖추어지고 천시가 조화로워 창고가 충실하고 인민은 공경하며 겸양하니, 진한(辰韓)의 유민으로부터 변한과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경외의 마음을 갖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왕께서 겸허한 마음으로 저로 하여금 교빙(交聘)을 하게 하셨으니 지나칠 정도로 예를 차린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왕께서 불같이 노하셔서 군대로 겁박하시니 이 무슨 뜻입니까?”라고 하였다. 마한 왕이 분하여 그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좌우 신하가 못하게 하여 그만두고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에 앞서 중국 사람들이 진(秦)의 난리에 고통을 겪다가 동쪽으로 온 자들이 많았는데, 다수가 마한의 동쪽에 거처를 정하고 진한과 더불어 섞여 살다가 이때에 이르러 점차 강성해졌다. 이런 까닭에 마한이 그것을 꺼려 책망이 있게 된 것이다. 호공은 그 족성(族姓)을 자세히 알 수 없는데, 본래 왜인으로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왔기에 호공이라고 칭하였다.29
【삼국사기】 39년(BC. 19) : 마한왕이 죽다
39년(B.C. 19)에 마한왕이 죽었다. 혹자가 왕에게 설득하기를, “서한(西韓)의 왕이 지난번 우리 사신에게 모욕을 주었는데 지금 그 상을 당하였으니 그 나라를 정벌하면 넉넉히 평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남의 재앙을 다행으로 삼는 것은 어질지 않은 일이다.”라며 따르지 않고,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위로하였다.
【삼국사기】 40년(BC. 18) : 백제 시조가 즉위하다
40년(B.C. 18)에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가 왕이 되었다.
【삼국사기】 43년(BC. 15) 2월 : 일식이 일어나다
43년(B.C. 15) 봄 2월 을유(乙酉) 그믐에 일식(日食)이 있었다.30
【삼국사기】 53년(BC. 5) : 동옥저 사신이 오다
53년(B.C. 5)에 동옥저(東沃沮)31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며 말하기를, “저희 왕께서 남쪽의 한(韓)에서 성인이 나셨다는 소식을 들으셨기에 신으로 하여금 와서 선물을 드리게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54년(BC. 4) 2월 : 살별이 나타나다
54년(B.C. 4) 봄 2월 기유일(己酉日)에 하고(河鼓) 자리32에서 살별[星孛]이 나타났다.
【삼국사기】 56년(BC. 2) 1월 : 일식이 일어나다
56년(B.C. 2) 봄 정월 신축(辛丑) 초하루에 일식(日食)이 있었다.33
【삼국사기】 59년(AD. 2) 9월 : 일식이 일어나다
59년(2) 가을 9월 무신(戊申)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34
【삼국사기】 60년(AD 3) 9월 : 용이 금성의 우물에 나타나다
60년(3) 가을 9월에 용 두 마리가 금성(金城)의 우물 안에서 나타났다.35 갑작스럽게 천둥이 치면서 비가 쏟아졌다. 성의 남쪽 문에 벼락이 쳤다.
【삼국사기】 61년(AD. 4) 3월 : 혁거세거서간이 죽다
61년(4) 봄 3월에 거서간이 승하(升遐)36하였다. 사릉(蛇陵)37에 장사 지내니, 담암사(曇巖寺)38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 : 혁거세(赫居世)는 신라의 건국 시조로, 박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따르면, B.C. 69년에 탄생하여, 13세가 되던 B.C. 57년에 신라의 왕위에 올랐고, 그로부터 만 60년이 지난 서기 4년에 승하하였다. 경주 지역의 선주 세력인 6촌장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으며, 알영(閼英)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죽어서 오릉(五陵)에 묻혔는데,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남해(南解)가 신라의 왕이 되었다. 거서간(居西干)은 혁거세에게 붙여진 신라 고유의 왕호이다. ↩︎
- 시조의 성은 박(朴)이고 : 시조 혁거세의 성씨가 ‘박’이었다는 것은 혁거세 당시의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이 시기에는 중국식 성씨 제도가 도입되지 않아 성씨의 개념 자체가 없었고, 단지 이름만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표현하였다. 6세기까지 만들어진 신라의 금석문 자료에 지배층의 성씨가 확인되지 않는 것은 이런 사정을 반영한다. 『양서(梁書)』 신라전에는 521년 당시 신라의 왕이었던 법흥왕을 ‘모진(募秦)’이라고 기록하였는데, 『남사(南史)』나 『책부원귀(冊府元龜)』에서는 아예 왕의 성이 ‘모(募)’인 것처럼 잘못 전하고 있다. 이 역시 적어도 6세기 전반까지는 신라 왕실에서 중국식 성씨 관념에 따라 성을 칭하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중국 측 기록에서 신라의 왕성(王姓)이 확인되는 것은 565년에 북제(北齊)가 진흥왕을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使地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으로 책봉하면서 왕의 이름을 ‘김진흥(金眞興)’이라고 표시한 것이 최초 사례이다. 6세기 후반에 이르러 중국과 직접 교섭이 활발해지면서 왕실을 중심으로 ‘김’이라는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는데, ‘박’의 경우도 대략 이 시기 이후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李純根, 11~26쪽). 그렇지만, 비록 박씨라는 성씨의 사용 시기는 늦더라도, 혁거세를 정점으로 하여 형성된 혈연집단이 상고기에 신라의 최고 지배층으로 존재했을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학계에서는 이들을 편의상 ‘박씨 집단’, ‘박씨 족단(族團)’ 등의 이름으로 칭하고 있다. ↩︎
-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 : 혁거세의 ‘혁(赫)’은 ‘붉다’, ‘밝다’, ‘빛이 나다’는 의미를 지니는 한자어이다. 성씨로 알려진 ‘박’도 ‘밝다’는 의미를 지니므로, ‘박혁거세’의 ‘박혁’은 같은 말의 중복이 된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불구내왕(弗矩內王: 붉은 왕, 밝은 왕)’이라는 이칭이 전하는데, ‘赫’이 ‘붉’, ‘밝’의 훈차(訓借)임을 잘 보여준다. ‘거세(居世)’는 ‘거서간’에서 ‘간’을 수식하는 용어 ‘거서(居西)’를 후대인들이 시조 이름의 일부라고 오해한 것에서 비롯된 동어반복으로 파악하기도 한다(李丙燾, 1976, 「新羅의 起源問題」,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597쪽). ↩︎
- 효선제(孝宣帝) : 중국 전한(前漢)의 황제로 B.C. 74년 7월에 즉위하여 B.C. 49년 12월에 사망하였다. 재위 기간 중 ‘본시(本始)’, ‘지절(地節)’, ‘원강(元康)’, ‘신작(神爵)’, ‘오봉(五鳳)’, ‘감로(甘露)’, ‘황룡(黃龍)’ 등의 연호를 차례로 사용하였다. ↩︎
- 거서간(居西干) : 신라 시조 혁거세에게 붙여진 왕호.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거슬한(居瑟邯)’으로도 나온다. 그 의미는 미상이나, 『삼국사기』 혁거세거서간 즉위조의 말미에서는 진한인들이 왕을 일컫는 말이었다고 하면서, ‘귀인(貴人)’을 칭하는 말이라는 설도 소개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혁거세에게만 한정된 왕호로 나오지만, 『삼국유사』의 왕력편과 기이편에서는 그의 뒤를 이은 남해(南解)도 ‘차차웅’이라는 왕호와 더불어 ‘거서간’으로 불렸다고 하여 차이를 보인다. ↩︎
- 서나벌(徐那伐) : 지금의 경주 지역을 가리키는 신라 때의 지명이다. 신라가 건국된 곳으로, 애초에는 국명으로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의미는 미상이다. ‘서나’는 금석문 자료나 중국 측 문헌 자료에 ‘사라(斯羅: 「포항 냉수리 신라비」, 『양서』 등)’, ‘사로(斯盧: 『삼국지』 한전)’, ‘설라(薛羅: 『진서』)’ 등으로도 나오는데, ‘가라(加羅)’가 흔히 ‘가야(加耶)’로도 표기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서라(徐羅)’의 이표기로서 ‘서야(徐耶)’가 자형이 유사한 ‘徐那’로 오기되었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다. 실제로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 신라조에는 “國號曰徐耶伐 或云斯羅 或云斯盧 或云新羅”라고 하여 ‘徐那伐’이 아닌 ‘徐耶伐’로 나온다. ↩︎
-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참고로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의 첫머리에는 알천 양산촌에 대한 주석이 붙어 있는데, 남쪽에 담엄사(曇嚴寺)라는 절이 있다는 내용이다. 또 이 조의 말미에는 혁거세의 유체를 묻은 오릉이 담엄사의 북쪽에 있다는 전승이 실려 있다. 이를 감안하면, 알천 양산촌의 위치는 지금 경주시 탑동 소재 오릉 일원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
-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참고로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훗날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서 ‘남산부(南山部)’로 이름을 바꾼 사량부(沙梁部)가 본래 돌산 고허촌이었다고 한 전승이 실려 있고, 남산부의 소속 촌 가운데 남산 서쪽에 위치한 촌인 마등오촌(麻等烏村)이 들어 있음을 고려하면, 남산의 서쪽 어딘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허(高墟)’라는 지명은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평왕 48년(631)조에 보이는 고허성 축조 관련 기사를 비롯하여 몇 군데서 확인된다. 한편 『삼국유사』 권제3 탑상제4 천룡사조를 보면, 남산의 남쪽에 세간에서 ‘고위산(高位山)’이라고 부르는 봉우리가 있고, 그 봉우리 남쪽에 천룡사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천룡사 부근에 석벽이 일부 남아 있음을 근거로 이를 고허성의 흔적으로 보면서, 고위산은 고허산의 음변(音變)이라고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朴方龍, 1985, 「都城·城址」, 『韓國史論』15, 國史編纂委員會). ↩︎
-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9년(32)조에 ‘본피부(本彼部)’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전하는데, 후대의 본피부가 경주 시내를 기준으로 동남쪽 낭산(狼山) 방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 부근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취산 진지촌에 협주를 붙여 ‘진지’의 이칭으로 ‘빈지(賓之)’와 ‘빈자(賓子)’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빈자촌의 경우 『동경잡기』 권2 각방조에 괘릉(掛陵)으로부터 용가산(龍加山)에 이르는 곳에 빈자방(賓子坊)이 있다고 나와서 참고가 된다. 이를 근거로 진지촌의 위치를 경주에서 울산 방면으로 나가는 길목의 괘릉 남쪽으로 비정하기도 한다(三品彰英, 1975, 『三國遺事考證 上』, 塙書房). ↩︎
-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9년(32)조에서 대수촌의 후신으로 전한 후대의 점량부(漸梁部: 모량부)가 경주 시내에서 건천 방면으로 나가는 쪽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이 일대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
-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금산이 경주시 동천동에 소재한 산임을 감안하면, 현재의 동천동 일대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가리촌의 한자가 ‘加里村’으로 표기되었다. ↩︎
-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 :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명활산 부근에 있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명활산 동쪽 기슭의 천군동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정연식, 2018, 「신라 초기 습비부(習比部) 고라촌[高耶村]의 위치」, 『韓國史硏究』 183). ↩︎
- 소벌공(蘇伐公) :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소벌도리(蘇伐都利)’로 나오며, 하늘로부터 형산(兄山)으로 하강한 존재로 소개되어 있다. ↩︎
- 나정(蘿井) : 혁거세의 탄강지로 전하는 우물로, 경주시 탑동 700-1번지에 위치하며, 사적 제245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상도 경주부 고적조에 “부(府) 남쪽 7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4차에 걸친 발굴 조사를 통해 제사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팔각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조성윤, 2010, 「慶州 蘿井 八角建物址의 創建年代와 存續時期」, 『嶺南考古學』 53). ↩︎
- 일식(日食)이 있었다 : 일식은 해가 달에 의해 가려지는 현상으로, 구체적으로는 해가 달에 의해 완전히 가려지는 개기(皆旣)일식, 일부만 가려지는 부분일식, 해의 가장자리만 남아 마치 가락지[環]처럼 보이는 금환(金環)일식 등이 있다. 일식이 일어나는 시기는 달이 해와 지구 사이의 일직선상에 위치하게 되는 음력 초하루(삭일: 朔日) 무렵 한낮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천(天)이 인간과 교감하면서 인사(人事)에 영향을 끼친다는 이른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이 유행하였는데, 이런 관념은 인간이 재이(災異)나 상서(祥瑞) 등의 징조를 통해 천의 의지를 파악함으로써 천과 호응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발전했다. 천인감응설은 한(漢) 무제 때 동중서(董仲舒)에 의해 이론적으로 정립된 이후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세계의 현실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국 정사류나 『삼국사기』 등의 사서에 일식을 비롯한 천문 및 자연 이변 관련 기사가 다수 수록된 것은 이런 관념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본기에 30건, 고구려본기에 11건, 백제본기에 26건 등 도합 67건의 일식 기사가 실렸는데, 신라의 경우 30건 가운데, 시조 혁거세거서간 대에 7건, 제2대 남해차차웅부터 제12대 첨해이사금 대까지 12건 등 도합 19건이 초반부에 몰려 있고, 이후 한참 동안 관련 기사가 보이지 않다가 하대에 들어가 제38대 원성왕 대를 시작으로 나머지 11건이 확인된다. 신라본기 초반부에 집중적으로 보이는 일식 기사는 신라 자체의 관측 기록이 아니라 『한서』, 『후한서』 등의 중국 측 사서의 해당 기록을 전재(轉載)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飯島忠夫, 1925; 김일권, 2016). 실제로 『삼국사기』에서 일식 관련 기사로서는 처음 나오는 본 기사의 경우, 『한서』 권27 오행지에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다. 한편 신라본기의 초반부에 실린 관련 기록은 중국에서 관측된 정보가 낙랑군으로부터 입수되어 내부 전승을 통해 내려와 『삼국사기』에 수록된 것이며 후반부 즉 통일신라 시대의 관련 기록은 신라에서 자체적으로 관측한 결과가 반영된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김용운·김용국, 2009). ↩︎
- 알영정(閼英井) : 현재 경주시 탑동에 위치한 오릉의 남쪽 숭덕전(崇德殿) 내에 알영정이라고 불리는 우물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상도 경주부 고적조에 알영정이 부(府) 남쪽 5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늦어도 조선 전기부터는 이 우물을 두고 알영이 탄생한 우물이라는 전승이 내려왔음을 알 수 있다. 우물 옆에는 일제 강점기 때 세워진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 비석이 있다. 알영정은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아리영정(娥利英井)’으로도 나온다. ↩︎
-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는데 :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알영정 옆에서 계룡(雞龍)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로 여자아이를 낳았다고 되어 있다.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옆구리로 아이를 낳았다고 하는 전승은 석가모니가 어머니인 마야 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불교 설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된다(三品彰英, 1975, 『三國遺事考證 上』, 塙書房, 440쪽). ↩︎
- 노구(老嫗) : 할멈이라는 의미인데, 여기서는 시조의 부인을 양육한 자로 등장한다. 훗날 석씨의 시조인 탈해가 금관국에서 거두어지지 않아 경주 동남쪽 해변의 아진포구에 이르렀을 때, 그를 발견하고 부양한 것도 ‘해변의 노모(老母)’로 전하여, 유사한 설화 구조를 보인다. 한편 『삼국사기』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노구(老嫗)’를 고대 사회에서 예지 능력을 지니고 점복(占卜)을 행하던 샤먼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崔光植, 1981, 「三國史記 所載 老嫗의 性格」, 『史叢』 25). ↩︎
- 왜인(倭人)이 병사를 일으켜 변경을 침범하려 했는데 : 신라와 왜 사이의 적대 관계가 오랜 연원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기사이다. 『삼국사기』에서 왜는 신라의 변경을 침범한 최초의 외부 세력으로 나온다. 신라본기에는 이 기사를 비롯하여 총 51건의 ‘왜’ 관련 기사가 나오는데, 그 기사의 대부분은 5세기 말 이전에 몰려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왜의 ‘침략’을 전하는 기사는 도합 29건에 이른다. 한편 신라를 침탈한 왜의 실체를 둘러싸고는 한반도 남부의 가야 지역에 들어와 있던 왜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井上秀雄, 1970), 일본열도에서 바다를 건너온 해적 집단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旗田巍, 1975). ↩︎
- 살별[星孛] : 혜성(彗星)의 일종으로 내뿜는 빛줄기가 짧고 빛이 사방으로 분출되는 것을 가리킨다(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 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2쪽). 『한서』 권1 고제 4년 7월조의 관련 기사에 대한 이기(李奇)의 주석에는 “孛, 彗類也. 是謂妖星. 所以除舊布新也.”라 하여 옛것을 없애고 새것을 퍼뜨리는 ‘요성(妖星)’으로 언급하였다. ↩︎
- 왕량(王良) 자리 : 고대 중국에서는 하늘의 적도를 따라 그 부근에 있는 별들을 동서남북 각각 7개씩 28개의 구역으로 구분하여, 이를 ‘28수(宿)’라고 명명하였다. 왕량은 그 가운데 서방인 백호 7수의 첫 번째에 해당하는 ‘규수(奎宿)’에 속한 별자리이다. 서양의 천문학에서는 카시오페이아자리에 해당한다. 『사기』 권27 천관서(天官書)5에는, “은하수[漢] 중에 있는 별 네 개를 천사(天駟)라고 하며, 그 곁에 있는 별이 왕량(王良)이다.”라고 소개되어 있다. 왕량에 살별이 나타났다고 하는 기사는 『한서』 권8 선제(宣帝) 황룡(黃龍) 원년(B.C. 49) 3월조에 같은 내용으로 확인된다. 본 기사는 『한서』에서 전재한 것으로 판단되는데, 『삼국사기』에서 이 기사를 실은 특별한 이유는 알 수 없다. ↩︎
- 삼(參) 자리 : 고대 중국의 천문관에서 28수(宿) 가운데 서방 백호 7수의 여섯 번째에 해당하는 별자리로서, 7개의 별로 구성된다. 서양 천문학에서의 오리온자리에 대응한다. 삼 자리에 살별이 나타났다고 하는 기사는 『한서』 권9 원제(元帝) 초원(初元) 5년(B.C. 44) 3월조에 같은 내용으로 확인된다. 본 기사는 『한서』에서 전재한 것으로 판단되는데, 『삼국사기』에서 이 기사를 실은 특별한 이유는 알 수 없다. ↩︎
- 알영(閼英) : 알영은 그 이름에 김씨의 시조로 전하는 ‘알지(閼智)’의 ‘閼’을 포함하고 있어, 애초에 김씨 족단에 속한 인물일 것으로 추정된다(金哲埈, 1952, 「新羅 上代社會의 Dual Organization(상)·(하)」, 『歷史學報』 1, 2). ↩︎
- 변한(卞韓) : 『삼국지』 권30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한조에는 ‘변진(弁辰)’으로 나오며, ‘馬韓’, ‘辰韓’과 더불어 삼한의 하나라는 의미로 ‘弁韓’으로도 표기되어 있다. ‘弁辰’이라는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애초에 진한과 밀접한 관계를 지녔을 것인바, 『삼국지』에서는 진한과 ‘잡거(雜居)’하며 의복과 거처는 진한과 같았고, 언어와 법속 역시 진한과 비슷하지만 귀신을 섬기는 것이 다르다고 기록하였다. 대체로 낙동강 하류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금의 경상남도 일대에 산재했던 소국들의 연합체로서, 가야연맹체로 이어지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편 애초의 표기인 ‘弁韓’ 대신 같은 음의 다른 글자인 ‘卞韓’으로 기록된 것은 7세기 중엽인 649년에 편찬된 『속고승전(續高僧傳)』(일명 『당고승전』)의 권13 의해9에 실린 원광(圓光)전과 같은 책 권24 호법하에 실린 자장(慈藏)전에서 처음 확인된다. 이후 신라말에 최치원이 지은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에서 “伏聞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髙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삼국사기』 권46 열전6 최치원)라고 하여 ‘卞韓’이라고 표기했고, 이것이 선례가 되어 『삼국사기』에서는 일괄적으로 ‘弁韓’ 대신 ‘卞韓’으로 기록되었다. 최치원이 변한을 백제와 연결시킨 것은 사실과는 동떨어진 오해였다. 조선 초기에는 권근(權近)이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지으면서 ‘변한은 곧 고구려’라고 하여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오해들은 17세기 초에 한백겸이 『동국지리지』를 통해, 변한은 백제나 고구려와는 관계없고 신라와 더불어 경상도에 남북으로 위치했던 가야로 이어진다는 주장을 하면서 마침내 불식되었다(盧泰敦, 1982, 「三韓에 대한 認識의 變遷」, 『韓國史硏究』 38, 154~155쪽). 참고로 12세기 초에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이 지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도 권6 궁전2 별궁조에 당시 고려의 왕족들이 거처한 곳의 하나로 ‘변한궁(卞韓宮)’의 존재가 확인되는데, 이를 통해 고려 시대에는 ‘弁韓’보다는 ‘卞韓’이라는 표기가 일반적이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盧泰敦, 1982, 「三韓에 대한 認識의 變遷」, 『韓國史硏究』 38). ↩︎
- 기해(己亥) 그믐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 『한서』 권10 성제(成帝) 하평(河平) 원년 4월 기해조와 같은 책 권27 오행지에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확인되어, 중국 측 기록을 전재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 날짜에는 실제로 중국 대륙의 중부 및 동부 지역, 한반도 중부 지역에서 개기일식이 있었던 것으로 지적된다(김일권, 2016, 「《삼국사기》 일식기록의 한중 사료 대조와 일식상황 비교」, 『新羅史學報』 37, 191~194쪽). ↩︎
- 낙랑인(樂浪人) : 낙랑은 한(漢) 무제가 B.C.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에 설치한 중국의 변군(邊郡)으로, 서기 313년 무렵 고구려의 미천왕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420여 년간 존속하였다. 관할 범위는 시대에 따라 달랐는데, 애초에는 위만조선의 중심지에 설치한 조선현(朝鮮縣)을 필두로 11개의 현이 소속되었으나, B.C. 82년경에 이르러 처음 낙랑군과 함께 설치되었던 임둔군(臨屯郡)과 진번군(眞番郡)을 흡수하여 그 지역들을 각각 낙랑군 동부도위(東部都尉)와 남부도위(南部都尉)의 관할 구역으로 편제하면서 규모가 배가되었다. 동부도위와 남부도위는 후한 초에 이르러 광무제가 낙랑의 토착인 왕조(王調)가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면서 폐지되었고, 이후 고구려의 성장과 반비례하여 낙랑군의 세력 범위는 급속히 축소되었다. 서기 204년 무렵에는 당시 요동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공손씨 정권이 둔유현(屯有縣: 지금의 황해도 황주로 비정) 이남의 과거 낙랑군 남부도위 관할 지역에 새로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여 변군으로서의 기능을 함께 수행하게 하였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 중국의 요령성 지역에서 찾으려는 견해도 있으나(尹乃鉉, 1985),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서북부 지역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李丙燾, 1976).
한편 신라의 중심지인 경주 지역과 낙랑군이 위치했던 한반도 서북부 지역이 거리상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혁거세거서간 시기에 낙랑인이 신라를 침략하였다는 내용의 본 기사는 사료적 신빙성을 두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이래 일본인 학자들은 아예 후대의 날조된 기사로 치부해 왔으며(津田左右吉, 1924), 우리 학계에서는 중국 본토에서 한사군에 와 있던 관리 및 상인집단이 군대를 대동하고 교역을 위하여 바닷길로 경주 지역까지 왔다가 충돌을 일으킨 사실로 이해하기도 하고(李鍾旭, 1979), 이른바 ‘북진한(北辰韓)’ 세력이 남하하던 도중에 낙랑과 충돌한 사건으로 파악하기도 한다(千寬宇, 1989). 그리고 6세기 이후의 사실이 『삼국사기』 편찬 과정에서 앞 시기로 소급·부회된 것으로 판단하기도 하고(宣石悅, 200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기에 보이는 최리(崔理)의 ‘낙랑국(樂浪國)’과 연관 지어 ‘낙랑’을 자칭한 옥저 지역의 토착 세력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文安植, 1997; 文昌魯, 2004). 이와는 달리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의 초기 기사에 보이는 ‘낙랑’은 본래 ‘진한(辰韓)’으로 표기되어 있던 원자료가 『삼국사기』에 기술되기까지 수차에 걸쳐 전록(轉錄)되는 과정에서 편사자의 오해로 말미암아 변개되었을 가능성을 타진한 견해도 있다(강종훈, 2011). ↩︎ - 을묘(乙卯) 그믐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 『한서』 권10 성제(成帝) 하평(河平) 3년 8월 을묘조와 같은 책 권27 오행지에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확인되어, 중국 측 기록을 전재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 날짜에 한반도에서는 해의 2/3 이상이 달에 의해 가려지는 부분일식이 있었던 것으로 지적된다(김일권, 2016, 「《삼국사기》 일식기록의 한중 사료 대조와 일식상황 비교」, 『新羅史學報』 37, 196~203쪽). ↩︎
- 호공(瓠公) : 혁거세거서간 대부터 탈해이사금 대까지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 본 기사에서 전하듯이 혁거세거서간 대에는 마한으로 사신을 간 것으로 나오며,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즉위조와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제4 탈해왕(第四脫解王)조에는 탈해가 이사금이 되기 전에 탈해의 계책에 의해 자신의 거처를 탈취당했다는 설화가 실려 있다. 탈해이사금 대에는 대보(大輔)로 임명되었다고 하며, 김씨의 시조인 알지(閼智)를 시림(始林)에서 발견한 것으로도 나온다.
한편 기록에서 그의 활동이 처음 나타나는 시기는 혁거세거서간 38년(B.C. 20)이며, 마지막으로 확인되는 시기는 탈해이사금 9년이다. 『삼국사기』에서 제시하는 기년을 그대로 따를 경우, 이 두 시기는 각각 B.C. 20년과 서기 65년이 되어, 호공의 활동 기간이 최소 85년에 이르게 된다. 혁거세거서간 38년 당시 호공의 나이가 10대 후반이었다고 가정하더라도, 탈해이사금 9년에는 그의 나이가 100살을 훌쩍 넘게 되는바, 호공의 활동 시기와 관련한 이 같은 문제점은 신라본기 초기 기사의 연대상의 모순 사례의 하나로 지적되었다(강종훈, 7쪽). 이에 대해서는 호공을 특정 인물로 보지 않고 박씨족을 대표하는 존재의 이름으로 파악하면서 기년의 문제점을 수긍하지 않는 견해도 있으나(李富五, 254~256쪽; 張彰恩, 49~50쪽), 같은 사서에서 좁은 시간 범위에 동일한 이름으로 나오는 인물이 실제로는 서로 다른 존재임을 입증할 수 있는 적극적인 근거는 미비하다. ↩︎ - 본래 왜인으로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왔기에 호공이라고 칭하였다 : 호공(瓠公)의 이름에서 ‘瓠’는 우리말로는 ‘박’이 된다. 이를 근거로, 호공은 박씨 족단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張彰恩, 2004, 「新羅 朴氏王室의 分岐와 昔氏族의 집권과정」, 『新羅史學報』 1). 본 기사에서 “본래 왜인으로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왔기에 호공이라고 칭하였다.”라고 한 것은 후대인의 부회의 사례로 볼 수 있다. ↩︎
- 을유(乙酉) 그믐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 『한서』 권10 성제(成帝) 영시(永始) 2년 2월 을유조와 같은 책 권27 오행지에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확인되어, 중국 측 기록을 전재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 날짜에 한반도에서는 해의 2/3 이상이 달에 의해 가려지는 부분일식이 있었던 것으로 지적된다(김일권, 2016, 「《삼국사기》 일식기록의 한중 사료 대조와 일식상황 비교」, 『新羅史學報』 37, 196~203쪽). ↩︎
- 동옥저(東沃沮) : 삼국시대 초기에 함흥을 중심으로 한 함경도 해안 일대에 자리 잡았던 예족(濊族)의 나라. 애초의 이름은 ‘부조(夫租)’였으며, 낙랑군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속한 이른바 ‘영동 7현’의 하나였다. 『삼국지』 권30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에서 ‘동옥저(東沃沮)’라는 이름으로 적기 시작하여, 역대 사서에서는 일반적으로 ‘옥저(沃沮)’로 표기하였다. 『삼국지』에 의하면, “큰 나라 사이에 끼여 핍박을 받다가 고구려에 신속(臣屬)하였다.”라고 하는데, 『삼국사기』 권15 고구려본기3 태조왕 4년(56) 7월조에 “동옥저를 정벌하여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았다.”는 기사가 나온다. ↩︎
- 하고(河鼓) 자리 : 견우성의 북쪽에 있는 세 개의 별을 가리킨다. 하고 자리에 살별이 나타났다고 하는 기사는 『한서』 권11 애제(哀帝) 건평(建平) 3년(B.C. 4) 3월 을유(乙酉)조에서 확인된다. 본 기사는 ‘2월 기유’라고 하였으나 『이십사삭윤표(二十史朔閏表)』(陳垣, 1962, 中華書局, 21쪽)에 따르면, 건평 3년 2월은 초하루[朔日]가 임자(壬子)일이어서 ‘기유(己酉)’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서』로부터 전재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발생하여, ‘三月 乙酉’를 ‘二月 己酉’로 잘못 전하게 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삼국사기』에서 이 기사를 실은 특별한 이유는 알 수 없다. ↩︎
- 신축(辛丑) 초하루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 『한서』 권11 애제(哀帝) 원수(元壽) 원년 정월 신축조와 같은 책 권27 오행지에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확인되어, 중국 측 기록을 전재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 날짜에 중국 남부 지역에서는 개기일식이 있었고, 한반도에서는 해의 2/3 이상이 달에 의해 가려지는 부분일식이 있었던 것으로 지적된다(김일권, 2016, 「《삼국사기》 일식기록의 한중 사료 대조와 일식상황 비교」, 『新羅史學報』 37, 196~203쪽). ↩︎
- 무신(戊申)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 『한서』 권12 평제(平帝) 원시(元始) 2년 9월 무신조와 같은 책 권27 오행지에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확인되어, 중국 측 기록을 전재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 날짜에 중국 남부 지역에서는 금환일식이 있었고, 한반도에서는 해의 2/3 이상이 달에 의해 가려지는 부분일식이 있었던 것으로 지적된다(김일권, 2016, 「《삼국사기》 일식기록의 한중 사료 대조와 일식상황 비교」, 『新羅史學報』 37, 196~203쪽). ↩︎
- 용 두 마리가 금성(金城)의 우물 안에서 나타났다 : 『삼국사기』 기사에 용이 우물을 비롯한 물가에서 출현하는 것은 왕 또는 그에 준하는 존재의 탄생이나 죽음을 예고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시조의 부인인 알영은 우물에 나타난 용의 옆구리에서 태어났으며, 3대 유리이사금이 죽기 전에도 용이 금성의 우물에 나타났다고 전한다. 아울러 신라 하대에 들어가 경문왕이 죽기 직전에도 용이 왕궁의 우물에 나타났다는 기사가 『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11 경문왕 15년(875) 5월조에 보인다. 백제본기에도 비유왕과 문주왕의 죽음에 앞서 흑룡이 강에 나타났다는 기사들이 확인된다. 본 기사에서 용 두 마리가 금성의 우물 안에 나타났다고 한 것은 다음 해에 있을 혁거세와 알영의 죽음을 미리 알리는 것으로 이해된다. ↩︎
- 승하(昇遐) : 먼 곳[遐]으로 올라가다[昇]는 뜻으로, 천자(天子)로 대표되는 군주의 죽음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고구려본기의 동명성왕 19년(B.C. 19) 9월조에서는 동일한 의미로서 ‘升遐’라고 썼다. 『삼국사기』에서는 신라 시조 혁거세와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죽음에 대해서만 ‘승하’라고 기록하였고, 백제의 시조 온조왕을 비롯하여 여타 왕들의 죽음은 제후의 죽음을 가리키는 용어인 ‘훙(薨)’으로 기록하였다. ‘薨’이라는 표현은 삼국의 왕들을 중국의 제후로 바라보는 인식이 반영된 것인데, 혁거세와 동명성왕의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薨’을 피해 ‘승하’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이전 시기부터 내려오던 독자적 천하관의 편린을 보여준다. ↩︎
- 사릉(蛇陵) : 경주시 탑동 67-1번지에 소재한 오릉(五陵)을 가리킨다. 사적 172호.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와 그의 아들 제2대 남해차차웅, 그의 아들인 제3대 유리이사금, 그의 아들로 탈해의 뒤를 이어 다시 박씨 왕실의 시대를 연 제5대 파사이사금 등이 묻힌 무덤으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전한다. 이들 네 명에 시조 혁거세의 부인인 알영을 더해 도합 5명이 묻혔다고 해서 ‘오릉’이라고 불려왔다.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단정할 수 없지만, 외견상 적석목곽분에서 흔히 나타나는 표형분을 이룬 무덤도 존재하여, 실제 혁거세 등 초기 박씨 왕들의 무덤으로 보지 않고 5세기 이후에 조성된 신라 지배층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근직, 2012). 한편 『삼국사기』와는 달리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서는 오릉을 혁거세의 다섯 유체를 각각 묻은 것으로 전하는데, 이는 인도의 경전 『리그베다』에 나오는 변재천녀(辨才天女) 설화를 차용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文暻鉉, 1972; 이근직, 2012). 관련 설화를 소개하면, “변재천녀가 죽어서 승천하였는데, 7일 만에 유체(遺體)가 다섯으로 나뉘어 땅에 떨어졌다. 이를 모으고자 하였으나, 큰 뱀이 방해하여 오릉에 묻었다.”이다. 이에 대해 『리그베다』에는 해당 설화가 나오지 않는다는 반박도 제기되어 있다(김기흥, 2015). ↩︎
- 담암사(曇巖寺) :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담엄사(曇嚴寺)’로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조에는 담암사의 ‘옛터’가 사릉의 남쪽에 있다고 하여, 조선 전기에는 이미 폐찰이 되었음을 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