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설의 시대 : 삼황오제(三皇五帝)

【‘삼황오제’(三皇五帝)의 형성】

중국에서 반고의 천지창조 이후에 등장하는 시대는 ‘삼황오제’로 알려져 있다. 삼황오제라는 말은 원래 《사기(史記)》의 ‘오제본기(五帝本紀)’에 당(唐)의 사마정(司馬貞)이 ‘삼황본기(三皇本紀)’를 보충하고 이것이 《사기》에 수록됨으로써 형성되었다.

중국 고대의 전설은 춘추 말에 ‘오제(五帝)설’이 형성되고, 전국시대 말기에 ‘삼황(三皇)’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리고 한대에 들어와 삼황이 오제 앞에 놓이게 되었다. 진나라를 세워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의 황제(皇帝)라는 호칭은 여기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삼황오제의 기운과 그들 이후 최초의 황제를 의미하는 시(始)를 넣어 작명하였다.

삼황을 오제보다 오래된 시대로 보고, 오제 앞에 두고 역사를 구성하게 된 것은 삼국시대(3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이야기로서 정리된 것은 오제가 빠르다. 한대 전반에 정리되어서 하ㆍ은ㆍ주 3대 앞에 두고 역사에 흡수된 것에 반해서, 삼황은 거기에서 남은 전설이 별로 인위를 가하지 않고 정리된 것이다.

【삼황(三皇)】

전설이기 때문에 확정적으로 삼황이 누구라고 할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삼황의 경우 책에 따라 복희(伏羲), 여와(女媧), 신농(神農), 수인(燧人), 축융(祝融), 황제(黃帝) 중 셋으로 구성된다.

  •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 《사기(史記)》 〈보삼황본기(補三皇本紀)〉에 인용된 《하도(河圖)》, 《삼오력(三五曆)》
  • 천황, 지황, 태황(泰皇) : 《사기》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 태호포희씨(太皥庖犧氏)ㆍ여와씨(女媧氏)ㆍ신농씨(神農氏) : 《삼황본기(三皇本紀)》
  • 복희(伏羲), 여와(女媧), 신농(神農) : 《풍속통의(風俗通義)》 〈황패편(皇覇篇)〉, 《춘추》 운두추(運斗樞)
  • 복희, 신농, 공공(共工) : 《통감외기(通鑒外紀)》
  • 복희, 신농, 축융(祝融) : 《백호통(白虎通)》
  • 수인(燧人), 복희, 신농 : 《풍속통의》 〈황패편〉에 인용된 《예위(禮緯)》 〈함문가(含文嘉)〉, 《서경》 대전(大傳)
  • 복희, 신농, 황제(黃帝) : 《십팔사략》, 《제왕세기(帝王世紀)》와 손씨주(孫氏注) 《세본(世本)》
  • 그 밖에도 복희ㆍ신농ㆍ여와ㆍ유소(有巢)씨 가운데 임의로 셋을 택하기도 한다.

대체로 많이 거론되는 버전은 복희ㆍ여와ㆍ신농이 ‘삼황’, 황제ㆍ전욱ㆍ제곡ㆍ요ㆍ순이 ‘오제’로 꼽힌다. 사마천(司馬遷)은 삼황의 전설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사기(史記)》의 기술을 오제본기(五帝本紀)에서부터 시작한다.

오늘날에는 삼황을 가지고 인류의 생활 변화를 비교하여 그들이 무엇을 하였는지 설명하고 있다. 즉, 유소씨는 나무를 얽어 집을 짓고 보금자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때 인류가 혈거(穴居)에서 지상으로 나와 살았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수인씨는 불을 발명하여 날것을 먹던 인류가 익은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으며, 복희씨는 그물을 만들어 물고기를 잡고 사냥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고, 신농씨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사냥으로 먹을 것이 부족했기 때문에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하였다.

삼황은 대체로 신적인 존재다. 복희와 여와는 인간의 머리에 뱀의 몸을 하고 있다. 둘은 부부 또는 남매라는 설, 남매였다가 부부가 됐다는 설이 있다. 인류를 창조한 존재인데, 대홍수로 둘만 남은 상태에서 결혼해 자손을 퍼뜨렸다고도 하고, 여와가 흙으로 자신과 닮은 인간을 빚었다고도 한다. 처음에 신경 써서 빚은 사람은 귀족, 나중에 귀찮아져서 진흙을 대충 뿌려 만든 존재는 천민이 됐다고 한다. 성서의 천지창조나 그리스 로마 신화와 닮은 구석이 많다. 복희는 인간에게 수렵과 목축, 불을 다루는 법을 가르쳤다. 여와는 인간들끼리 혼인해 자손을 번식하도록 해 창조와 생명의 신으로 불린다.

복희와 여와. 인간의 머리에 뱀의 몸을 하고 있다.

염제라고도 불리는 신농은 복희ㆍ여와에 비해 인간에 가까운 존재다. 인간에게서 태어났으나 머리는 소, 몸은 사람인 반인반수의 모습이었다. 인간에게 농사를 가르쳤다. 먹을 수 있는 식물과 독초를 가려내기 위해 스스로 온갖 풀을 먹고 다니다 죽을 뻔한 고비를 숱하게 넘겼다. 차(茶)를 알게 된 후부터는 독초에도 끄떡없게 됐다고 한다. 한국과 중국에선 매년 임금이 선농제(先農祭)를 지내며 농사의 신인 신농을 섬겼다.

신농은 강(姜)씨 성을 얻었는데 중국의 천수(天水) 강씨와 한국의 진주 강씨가 신농의 후손이 되는 셈이다. 시장을 만들어 서로 필요한 물건을 교환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신농이다.

그에겐 강력한 도전자가 있었으니 바로 황제(黃帝) 헌원(軒轅)이다. (황제는 위에서 언급한 ‘삼황’에도 속하고, 아래에도 언급하는 ‘오제’에도 속하는 인물이다) 황제는 천하의 주도권을 놓고 신농과 세 차례 싸워 모두 이겼고, 북동쪽 치우(蚩尤) 세력과 탁록(涿鹿)에서 벌인 결전에서 승리해 중원을 평정했다.

【오제(五帝)】

사마천이 5제로 든 것은 황제 헌원(黃帝 軒轅)ㆍ전욱 고양(顓頊 高陽)ㆍ제곡 고신(帝嚳 高辛)ㆍ제요 방훈(帝堯 放勳 : 陶唐氏)ㆍ제순 중화(帝舜 重華 : 有虞氏)이며, 별도로 소호(少昊) 등을 드는 경우도 있어 일정하지 않다. 원래 이 전설은 다양한 신화ㆍ전설이 혼입된 것이며, 도덕적ㆍ정치적으로 억지로 끌어들인 것이어서 그 기원은 애매하다. 오행설이 일반화된 전국시대 말 이후 이야기 경향을 띠게 되었는데 현존하는 책에는 약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당요(唐堯), 우순(虞舜) : 《황왕대기(皇王大紀)》
  •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당요(唐堯), 우순(虞舜) : 《세본(世本)》, 《대대례(大戴禮)》, 《사기》 〈오제본기〉
  • 태고(太皋, 복희), 염제(炎帝, 신농), 황제(黃帝), 소고(少皋), 전욱(顓頊) : 《예기(禮記)》 〈월령(月令)〉
  • 황제(黃帝), 소고(少皋), 제곡(帝嚳), 제지(帝摯), 제요(帝堯) : 《도장(道藏)》 〈동신부(同紳部)·보록류(譜錄類)ㆍ곤원성기(混元聖記)〉에 인용된 양무제(梁武帝)의 말
  • 소호(少昊), 전욱(顓頊), 고신(高辛), 당요(唐堯), 우순(虞舜) : 《상서서(尙書序)》, 《제왕세기》, 《십팔사략》

오제는 대부분 춘추시대까지 존재했던 각 나라의 시조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제 중의 황제는 오제에도 언급되지만, 위에서 언급한 삼황에도 언급되는 인물이다. 그는 배와 수레 만드는 법, 집 짓는 법, 옷감 짜는 법, 약초 이용법 등을 가르치고 문자와 악기를 발명했으며 중원(中原)의 다수 부족장들을 통합한 최초의 부족 국가를 건립했기 때문에 중국 민족(화하족(華夏族))의 시조이자 문명의 개조로 숭앙된다.

【삼황오제와 동이족】

삼황오제는 중국 역사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나, 이들은 모두 동이족(东夷族)이었다는 중국의 사료들이 존재하며, 이 동이의 역사적인 범주가 과거에 산둥성(山东省, 산동성)이나 요동성 등을 포함했다는 점에 의거하면 삼황오제를 비롯해 동이 전체를 한민족으로 보는 비주류 역사관도 있다.

고사변(古史辯)에는 ‘동이(东夷)는 은나라 사람과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근원이 같다. 태호(복희씨를 말함), 제준(帝俊), 제곡(帝嚳), 제순(帝舜), 소호(少昊), 그리고 설(契: 은을 세운 탕왕의 선조) 등이 같다고 하는 것은 근래의 사람들이 이미 명확히 증명하는 바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신라인과 가야인은 그 조상을 소호 금천씨라고 했고, 고구려인은 그 조상을 제곡 고신씨 또는 전욱 고양씨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제 – 황제】

오제도 삼황과 같이 다섯 임금이 누구인지 설이 분분하다. 단지 사마천의 『사기』 「오제본기」에 따르면 황제(黃帝)ㆍ전욱(顓頊)ㆍ제곡(帝嚳)ㆍ요(堯)ㆍ순(舜)이라고 하였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황제는 신농씨의 후예라고 한다. 황제는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했다는데, 사람들에게 창과 방패, 수레바퀴, 옷, 글자, 거울, 60갑자, 팔괘 등을 만들어줘 문명을 일으켰다. 한의서 『황제내경』도 그가 지은 것으로 돼 있다.

황제의 초상화

당시 희수(姬水, 위수의 지류)에서 일어나 희성(姬姓)인 황제가 이끄는 부락과 역시 신농씨의 후예로 강수(姜水, 위수의 지류)에서 일어나 강성(姜姓)인 염제(炎帝)가 이끄는 부락이 있었다. 이 두 부락은 중원(中原) 문화의 개척자로 당시 호북 일대의 구려(九黎)족 치우(蚩尤) 부락이 북쪽 중원으로 올라오려고 하여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신화에 따르면 치우는 짐승의 몸으로 말을 하는 무서운 인물로 묘사되었는데, 염제와 황제 부락이 연합하여 52차에 걸친 격전 끝에 탁록(涿鹿, 하북 탁록의 동남)에서 치우를 격파하였다. 그 후, 염제 부락과 황제 부락이 대립하여 황제 부락이 판천(阪泉)에서 승리하여 제후들로부터 천자로 받들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황제는 중국인들에게 그들의 조상으로 받들어졌는데, 스스로 ‘황제의 자손’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황제 부락과 염제 부락이 오랫동안 연합하여 발전된 것이 한(漢)족의 전신인 화하족(華夏族)을 형성하였기 때문에 최근에는 ‘염황의 자손(炎黃之孫)’이라고 바꾸어 부르고 있다. 그리고 생활에 필수적인 문자, 농구(農具), 역법, 도량형 등 모든 것을 황제가 발명하였다고 말하기를 좋아하였다. 심지어 중국 땅을 주(州)로 나누어 다스려 봉건(封建)이 시작되었으며, 정전법(井田法)도 그가 시작하였다고 한다.

【오제 – 전욱】

전욱(顓頊)은 황제의 손자(『산해경』에선 증손자로 나옴)로 황제가 자리를 물려줬는데, 하늘과 땅의 통로를 끊어 신계(神界)와 인간계를 구분케 했다. 길에서 남자가 지나가면 여자가 비켜서도록 법도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옮겨감을 상징하는 걸로 풀이된다. 처음으로 전국을 9주(州)로 행정구역도 나눴다.

【오제 – 제곡】

전욱의 뒤를 이은 제곡(帝嚳)은 황제의 증손자다. 황허(黃河) 중상류에서 창장(長江) 중상류까지 세력을 넓혔다. 천문을 관찰해 절기(節氣)를 구분, 백성들이 농사에 활용토록 했고 각종 노래와 악기를 만들어 사람들이 음악을 즐기도록 했다. 상나라의 갑골문에선 제곡이 상나라를 세운 탕(湯)왕의 시조로 기록돼 있다.

【오제 – 요ㆍ순】

오제 가운데 황제 다음으로 요와 순을 현명한 군주로 들고 있다. 이들은 중국의 전통 정치 사상에서 가장 이상적 군주이며, 역대 제왕(帝王)의 모범이었다. 『사기』에 따르면 요는 황제의 현손이고, 순은 8세손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는 거의 같은 시대 사람이다. 그리고 그 시기는 대체로 하 왕조보다 170여 년 앞선 기원전 2357년부터 2184년까지로 추정하고 있다.

요(제요[帝堯]라고도 한다)는 제곡의 아들로 뒤를 이은 순(제순[帝舜])과 함께 ‘요순시대’라는 성군(聖君)의 대명사로 불린다.

요는 국호를 당(唐), 도읍을 평양〔平陽, 산서 임분(臨汾)〕에 두었다. 그는 인자하고 모든 일에 관용을 베풀어 백성들은 자유롭고 안락한 생활을 보냈으며, 국가의 간섭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백성들은 요의 재능을 직접 느껴 보지 못하여 그의 실제 모습을 더욱 알지 못하였다. 그의 업적은 역법을 제정하고, 치수(治水)를 잘한 것이었다. 요는 임금임에도 겨울에는 가죽 옷, 여름에는 삼베옷을 입었고 띠집에서 채소국으로 끼니를 채웠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일만 한 나머지 신선이 요를 보고 “저게 임금의 얼굴인가”라며 수명을 늘리는 신령스런 잣을 나눠줬는데, 그것도 먹을 새 없이 다시 일했다고 한다.

순(제순[帝舜])은 본래 역산(歷山, 산서 영제설과 산동 제남설)의 농부였는데, 어려서 다른 핏줄의 동생을 데리고 들어온 계모 밑에 살면서 효도와 형제의 우애로 이름났고, 어부ㆍ도장(陶匠)ㆍ상인이 되어 여러 방면에서 재주를 보여 주었다. 따라서, 그의 재덕이 여러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그에 의지하려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읍(邑)을 형성하게 되었다. 요는 순을 불러들여 두 딸을 시집 보내 그가 가정을 다스려 나가는 능력을 시험하였고, 그 결과 그에게 국정을 위임하였다. 순은 국호를 우(虞)라 하고, 도읍을 포판〔蒲坂, 산서 영제(永濟)〕에 두었다. 순 역시 자신의 아들이 아닌 우(禹)에게 선위했고(순의 자의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우는 자신의 자손에게 왕위를 물려주며 중국 최초의 왕조라고 전해지는 하(夏)나라를 세웠다.

요가 후세 사람들로부터 칭송받는 것은 천하를 공(公)으로 생각하고, 제위를 순에게 선양(禪讓)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가(儒家)가 순을 성인군자로 묘사한 것과 달리 한비자(韓非子) 같은 법가(法家)나 후대의 일부 사서는 ‘순이 요를 감금했고 요의 중신들을 숙청했으며, 자신의 아버지를 추방하고 동생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쿠데타를 선위(禪位)로 포장했다고 의심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닌 게 아니라 후대의 왕위 찬탈자들은 상습적으로 요순의 사례를 들어 자신을 포장했다.

요는 처음에 도(陶, 산동 정도)에 거주하다 후에 당(唐, 하북 보정)으로 옮겨 ‘도당(陶唐)’씨라고 부르거나 ‘당요(唐堯)’라고 불렀다. 순은 조상이 우(虞, 산서 우향)에 살았기 때문에 우씨 또는 ‘우순(虞舜)’이라고 하였다. 때문에 이 두 사람의 시대를 가리켜 ‘요순 시대’ 또는 ‘당우(唐虞) 시대’라고 하며, 중국인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여기는 시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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