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진근 [郭塡根, 1897~1941]

곽진근 [郭塡根, 1897~1941]


곽진근(郭塡根, 1897~1941)은 1897년 전북 김제에서 출생하였다. 김제의 만경교회는 1913년 곽영욱의 주도로 세워졌는데, 이 분은 이 지역의 유지로 민족주의자였으나 해방 직후에는 인민자치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기독교신앙을 지켰고, 곽영욱 장로가 8월 18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교회는 무사했다. 그의 둘째 아들은 장로교 총회장을 지낸 곽진근 목사이며, 일제 말 친일행적을 남겼다. 그의 조카 곽유근 장로의 두 아들은 좌익에 가담하였으며, 한국전쟁 기간에 적극적으로 우익을 탄압하였다. 이 때문에 곽유근은 김제노회에서 장로 자격을 박탈당했다. [출처 – 교회와 신앙]

1909년 군산 선교부 부위렴 선교사로부터 전도를 받고 기독교를 접하였다. 이해 만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전주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24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고(제17회), 전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김제 만경교회에서 목회(1924년 2월 3일 ~ 8월 31일)하였으며, 전북 삼례교회(1903년 설립)에서 시무하였다(1924년 10월 5일 ~ 1925년 9월 사임).

1925년 김제원평교회를 시무하였으며 전북노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9년에는 전주 완주교회에서 시무하였으며, 전북노회 회계를 역임하였다. 1931년에는 전북노회 노회록 서기가 되었다. 1936년 5월 5일, 전북노회 효자리교회(효자동교회) 임시당회장을 역임하였다. 1937년에는 정읍군 신태인읍교회와 화호교회에서 시무하였으며, 총회 서기로 선출되어 2년간 역임하였다.

그는 1938년 화호교회 당회장으로 재직하면서 전북노회에 신사참배 결의안을 제출하는 등 신사참배 강요에 앞장서서 동조한 목회자였다. 전북노회는 곽진근의 건의를 받아들여 헌의했으며, 결국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이때 곽진근은 서기로서 사회를 맡아 회의를 진행하고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는 선언으로 시작되는 신사참배 결의선언문을 낭독했다. 1939년에는 총회 서기를 연임하였으며 전북노회장을 역임하였다.

1940년에는 장로회 제29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총회장으로서 《장로회보》를 교단 내 친일 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연맹의 기관지 성격으로 바꾸었고, 황기 2600년(1940년)을 기념하기 위해 10월 20일을 애국주일로 지키면서 전 목회자가 신사참배를 하도록 강요한 일도 있다. 이 시기에 장로교 목회자들은 모두 창씨개명을 하고 보고하도록 했다.

1941년에도 그는 총회장이자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전북노회 연맹 소속으로 김세열, 김종대와 함께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한 순회 강연을 다녔다. 1941년 4월 29일부터 4월 30일까지 장로교 총회는 새문안교회 예배당에서 장로회 여자신도대회를 개최하고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연맹 여자부를 결성하였다. 첫날은 천장절 봉축식을 갖고 총회연맹 이사장 곽진근 목사의 시국강연을 들었으며 이틑날에도 시국강연회를 가졌는데, 유각경은 천장절을 당하여라는 강연을 하였고 곽진근은 신체제의 기독교인이라는 강연을 하였으며 일제 해군 대좌 구로키는 세계 대세와 우리 해군이라는 강연을 하였다.

총회연맹 이사장 곽진근은 1941년 9월 24일부로 각 노회연맹 이사장과 각 연맹 여자부장에게 “부여신궁어조영 근로봉사에 관한 건”이라는 공문을 보내 10월 30일부터 11월 1일까지 2박 3일의 일정으로 각 노회 대표들이 ‘근로봉사’ 활동을 할 것을 통고했다.(「장로회보」1941년 10월 1일자, “총련발 제54호” ; 15일자, “총련발 제54호의 2.”)

그는 1941년 총회장 임기를 마친 뒤 그해 말에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청년목사로 청년문제의 권위자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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