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혁 [南宮爀, 1882~1950, 납북]

장로교 목사, 신학자, 제21회 장로회 총회장. 한국인 최초의 신학박사요 최초의 신학교 교수로서, 해방 이후에는 한국기독교교회연합회(KNCC) 총무로 재직하고 있다가 6ㆍ25 당시 납북되어 그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개신교에 입교하기 전까지】
남궁혁(南宮爀, 1882~1950, 납북)은 1882년 7월 1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났다는 기록도 있다). 그의 그의 가문은 한말의 애국지사 가문이었으며 그의 외조부(任氏) 임형준은 승지(承旨)와 평양감사를 지닌 고관이었다. 남궁혁이 아주 어렸을 때, 임오군란이 일어나는 등 정계가 어려워지자, 그의 집은 경기도 용인으로 피난가게 되어 세 살 때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1885년, 그의 외조부가 평양감사로 부임하게 되자 평양으로 따라가 일곱 살까지 평양 감영(監營)에서 성장하였다.
1896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였고, 1901년 배재학당을 졸업한 후, 벙커(D. A. Bunker) 선교사의 주선으로 인천세관을 거쳐 목포세관에서 근무하였다. 1903년, 전라남도 목포해관(海關, 지금의 목포세관)으로 발령이 나 목포에서 생활하던 중에 프레스턴(John F. Preston, 변요한) 선교사와의 만남을 통하여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는 개신교에 입교한 뒤 세관원을 사임하고 목포 영흥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결혼부터 장로회신학교 입학까지】
당시 선교사들이 서울 정신여학교 교장에게 부탁하여 그에게 배필될 만한 신앙의 여성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여, 그는 황해도 솔내(松川)의 명문 출신인 김함라(金涵羅)를 만나게 되었고 1908년 게일(J. S. Gale, 奇一) 선교사의 주례로 결혼하였다. 김함라는 선교사들이 기대한 그대로 자신의 남편을 훌륭한 신앙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김함라는 여동생 김마리아와 함께 고모인 김필례(金弼禮)가 재직하던 서울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인재였다. 김필례는 1918년 최흥종(崔興琮)의 동생인 최영욱(崔泳旭) 의사와 결혼하였다. 그의 영어 실력은 뛰어나 강습을 받기 위해 수많은 청년들이 모여들었고 후일 한국 사회의 명사가 된 김성수ㆍ김병로 그리고 장면의 부친 등이 모두 그에게 배웠다.
1909년 광주숭일학교로 옮겼다. 이후 1916년 광주북문안교회(현 광주제일교회와 광주양림교회) 제2대 장로로 추대되었다. 1917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3ㆍ1운동 당시, 일제에 의하여 광주 자택을 모의 장소로 제공한 이유로 체포되었고, 1919년 6월 16일 광주지방법원에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죄를 선고받았다.
【목사 임직 이후 미국 유학까지】
1921년 6월 15일,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제15회). 곧이어 6월 29일, 제8회 전남노회에서 목사 임직을 받았으며, 금정교회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아 제3대 위임목사로 취임하였다.
1922년, 남장로회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유학길이 열려 프린스턴신학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1928년 서울 YMCA 소속 외국인 선교사들이 발행한 ‘The Korea Mission Field’에 유학 경위의 일단을 보여주는 기록이 남아 있다. 로버트 녹스(Robert Knox) 목사는 ‘내 친구 남궁혁(Meet My Friend – Namkung Hyuk)’이란 글에서 신의 기적을 체험한 남궁혁에 대해 서술했다.
“당초 남궁혁은 가족과 떨어져야 하는 유학생활에 뜻이 없었다. 어느날 광주와 순천을 오가던 만원버스가 협곡에서 60m 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승객 대부분이 큰 부상을 당하는 사고였지만 남궁혁은 뒤집어진 차량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다. 현장에서 즉사할 수도 있었던 참사를 모면한 것이다. 생명을 부지하게 된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특별한 과업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 길로 마흔 줄의 그는 유학에 나섰다.”
1923년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이듬해(1924년) 신학석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리치몬드에 있는 유니온신학교의 박사과정에 진학하였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우에서 열린 세계주일학교 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귀국 이후 해방 이전까지】
1925년, 박사과정을 마치고 귀국하고 장로회신학교 교수로 취임하였다. 그는 교수직의 수행과 함께 성서 번역사업, 성서의 주석 발간 및 신학교 교우지인 「신학지남」의 편집까지 맡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일을 도운 인물로서 김인서ㆍ강흥수ㆍ김재준 등이 있었다. 그는 후배를 극히 사랑한 도량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박형룡 목사가 미국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왔을 때 신학교수의 길을 열어주었고, 김재준 목사의 생계를 위해서도 염려하였으며, 이성휘ㆍ송창근 박사 등 후배의 진로를 후원해 줌으로써 한국교회를 활기띠게 하는데 공헌하였다.
박사 학위 논문은 귀국한 후 제출되었고, 1927년 박사학위를 받았다(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1929년에 박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나온다). 그 사이, 「신학지남」의 편집장으로 활동하였다(1928년).
1932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 노회장이 되었으며, 제21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이 되었다.
1938년 9월 20일, 장로회신학교가 일본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사실상 폐교되자 신사참배에 동의할 마음이 없었던 그는 중국 상해로 망명해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해방 이후 납북까지】
1945년 상하이 거류민 단장으로 선출되기도 한 그는 조국의 해방으로 귀국하자마자 곧 미군정청 장관의 요청으로 적산관리처장으로 취임하였다.
미군정 시기인 1947년에 그는 재무부 내의 세관 업무 관련 직책을 맡았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재무부 세관국장을 지냈다는 설도 있으나 당시 재무부 직제에는 세관국이 없다는 반론도 있다.
부패한 정치정세 속에 더 이상 몸을 담고 싶지 아니하여 1948년에 관리생활을 청산했다. 1948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후신이라 하여 서울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개교하려는 무렵에 박형룡 목사가 그를 찾아와 교장으로 취임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내가 한국교회의 분열을 책임질 만한 인물이 되지 못하니 사양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미 그는 그때에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절친 김관식 목사가 타계하자 그의 후임으로 1948년 10월, 한국기독교연합회 총무에 취임하였다(1948~1949년). 그리고 1949년 11월 태국에서 열린 동남아 기독교 반공대회에서 부회장에 선출돼 반공주의자라는 평가도 받았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 집에 들이닥친 공산군들이 가택수색을 하여 그를 체포하였고 납북되었는데 그 이후 생사를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