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식 [李仁植, 1889~1950]

이인식 [李仁植, 1889~1950]


이인식(李仁植, 1889~1950)은 1889년 11월 4일, 황해도 황주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8세 때인 1907년 기독교에 입신하여 신앙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21세가 되었을 때(1910년) 전도사로 임명되어 선교사들의 지도로 사역한 바 있다.

1917년 6월, 그는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는데(제9회), 함께 졸업한 강규찬, 김학린, 김병조, 김창선, 김응규, 박상순, 변린서, 이만집 등과 함께 평양노회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목사로 장립받았다.


1919년 그는 창동교회에서 목회하였다. 창동교회는 저 유명한 장대현교회에서 세운 교회로서, 처음 1년간은 장대현교회의 안봉주(安鳳周) 장로와 주공삼(朱孔三) 장로가 창동교회를 도왔다. 창동교회는 북교회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었고, 사창골교회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었다. 창동교회는 1905년 1월 22일에 세워졌다. 창동교회의 초대 담임자는 블레어(W.N.Blair) 선교사였고, 1919년부터 이인식(李仁植) 목사, 1940년에는 김화식(金化湜) 목사, 그 후에는 황은균(黃殷均) 목사가 담임했다.


1932년 9월, 제23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이 해는 한국 장로교 선교 50주년을 맞이하는 희년의 해였다. 첫 공식 선교사의 입국 50주년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와 결의가 다뤄진 총회였으며 신학적 논쟁도 본격화됐으나 여권(女權)문제와 모세기적에 대한 논쟁 등은 교단의 보수성만을 공고히 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당시 이인식 목사는 평양 기림교회를 맡아 시무하고 있었다.

1934년 9월 9일, 숭실전문학교 강당에서 총회장 이인식 목사의 사회로 희년기념음악회가 열렸다. 이해 장로교 총회는 총회장 이인식 목사의 이름으로 총독에게 2차에 걸쳐 신사참배 강요금지에 대해 청원을 제출하려 하였으나 일제 상부에 의해 저지당했다. 1935년 총회적인 차원에서 신사참배 문제를 논하기 위해 총회는 정인과 염봉남, 이인식, 장규명, 곽신근, 이학봉, 오천영을 위원으로 한 연구위원을 임명하였다.


1937년, 평양노회가 주기철 목사를 사임시키고 이인식 목사를 산정현교회 당회장으로 임명하였다.

“주기철 목사는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와 총회장의 경고문을 무시한 이유로 교회헌법 권징조례 19조에 의하여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 사직시키다. 이인식 목사를 산정현교회 당회장으로 임명하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곧 고향에 있는 북한으로 돌아가 북한교회 재건사업에 힘을 쏟았다. 그 이후 1950년 6ㆍ25 전쟁 중에 생을 마감하였다.

한때 황주읍 안성교착 교학을 역임하기도 하였고, 평양 숭실전문학교 이사와 서울고등성경학교 교장과 평양노회 노회장을 역임하였다. 후에 경기노회 공로목사로 추대되었다.

제23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선출된 이인식 목사는 1916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뒤 직전 총회인 제22회 총회에서 부회장에 선출되고 이듬해 총회 당시 평양노회 총대로서 참석, 총회장에 선출됐다. 그러나 총회장 가운데는 보기 드물게 개인 신상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다. 교회사가 김광수 목사가 밝힌 바에 따르면 해방 후 북한교회 이 목사는 북한교회 재건에 앞장 섰던 것으로 전해지면 이북지역에 이북5도 노회가 조직된 이후 김양선 목사와 함께 남한교회를 방문했으며 이 때 귀환하지 않고 이남해 정착했다고 밝혔다. [☞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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