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화 [崔志化, 1884~1950]

최지화 [崔志化, 1884~1950]

장로교 목사, 교수, 제30회 장로회 총회장


최지화(崔志化, 1884~1950)는 1884년 평안북도 안주에서 출생하였고 안주 성내교회를 출석하면서 보통학교 과정을 졸업하였다. 그는 선교사의 권유를 받고 평양 숭실중학교에 진학하여 1911년 졸업하였다.

1917년 숭실대학을 졸업한 그는 같은 해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그에 대한 기록 중에는 1918년부터 2년간 조선국민회에 가담해 체포된 것을 시작으로 약 2년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해 활동한 기록이 있다.


그는 어렸을 때 다녔던 안주 성내교회(안주읍교회)에서 장로로 장립되었는데, 1919년 3ㆍ1운동에 참여한 뒤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평양 숭덕학교에서 열린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에 윤원삼, 김선두, 강규찬, 도윈권 등과 함께 참여했다.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1919년 10월 31일 상하이에서 박은식, 김구, 도인권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전 국민이 일치 단결해 일제에 독립을 요구할 것을 호소하는 선언서를 발표했다. 1919년 12월 중국 안동현에 사무소를 설치하고 안병찬을 총재로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조직할 때 교육부장을 맡았다.

1920년 4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참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고, 다음해(1921년) 7월에 상하이에서 고려화동유학생연합회를 조직할 때 주요한과 함께 금릉대학 신학과 학생으로서 의사부 의사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중퇴한 이후 난징의 금릉대학에서 신학공부를 계속했던 것이다. 그는 1923년 난징 금릉대학 신학과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12월 최남선과 함께 평양에서 교육 강연을 하였다.


1924년 6월 평양노회에서 강도사로 재임하다가 안주노회로 옮겨 12월 제7회 안주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안주서교회를 담임했다. 이후 1930년 5월 안주중앙교회를 담임했고, 이후 평양 연화동교회를 담임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수년간 투옥 생활 끝에 옥사한 주기철은 최지화의 평양신학교 후배이며 같은 평양노회 소속이었다. 일제 경찰은 주기철을 회유하기 위해 당시 평양노회장이던 최지화를 내세웠으며, 주기철이 뜻을 굽히지 않자 역시 최지화를 시켜 그를 파면하도록 하였다.

1939년 9월 제28회 장로회 총회에서 결성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 평의원을 맡았으며, 그해 12월 평양노회장으로서 임시노회를 소집해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주기철 목사의 면직 처분을 결의했다. 1939년 평양노회에서 파면된 주기철은 67년이 지난 2006년에 복권되었다.


1940년에는 평양노회장을 역임하였는데, 1940년 3월 20일 자신이 시무하던 연화동 예배당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 장로회 연맹 평양노회지맹을 결성하고 이사장 겸 평의원을 맡았다. 그해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부총회장에 선임되었다.

1941년 8월 장로회 총회 중앙상치위원회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전시체제 실천 성명서’를 결의해 발표할 때 상치위원으로 참여했다. 그해 11월 제30회 총회가 평양 창동교회에서 개회되었고, 제30회 총회장으로 최지화 목사가 선임되었다. 당시 부총회장은 전필순 목사가 선임되었다.

실제로 전필순 목사는 1941년 총회, 곧 일제의 강압으로 총회 개회 전에 국가의식 곧 동방요배와 기미가요를 부르고 나서 진행된, 그런 총회에서 부총회장으로 선임되었는데, 실제로는 총회장 물망에 오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 역시 서북출신의 최지화 목사에게 4표 차이로 밀려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부터 회의를 일본어로 진행하도록 일본 경찰에게서 강요받고 있어서 회의 전체를 결국 일본유학을 한 전필순이 맡아서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음 회기인 1942년의 회기에는 당연히 직전 부총회장이 총회장이 되는 전례까지 무시되면서, 나이가 어리다는 구실로 결국 2표 차이로 김응순 목사가 총회장이 되고 전필순 목사는 역시 부총회장에 머물고 말았던 것이다. 해방 전 마지막 총회에서의 일이었다. 김응순 목사는 총회 임원 중 1940년에 이미 창씨개명을 한, 서북 황해도의 총대 목사였다. 하지만 김응순은 서북계에서도 호된 반격을 받는다.

11월 22일 오전에는 총회 총대원 전원이 총회장의 인솔에 의해 처음으로 평양신사를 참배하고 장대현교회에서 총회 창립 30주년 기념식을 최지화 총회장의 사회로 진행하였다. 총회 중에 국방헌금하기로 결의하자 즉석에서 모금된 헌금액수는 230앵이었다.

이미 중일전쟁(지나사변)은 일본 황군들은 동남아를 점령하면서 그 기세가 당당하였다. 이러한 시기를 맞이한 총회는 각 노회로 하여금 ‘朝鮮長老敎徒愛國機相當數’를 헌납하기로 작정하고 그 헌금은 유아세례자와 실종자를 제외한 교인수 비례로 1인당 1앵 씩 헌금하기로 가결하였다. 최지화 목사는 불행 한 시기에 총회를 맡아 일제 부역에 협력한 인물이 되었다.


최지화 목사는 1942년 4월 조선기독교연합회 위원을 겸임했고,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연맹 이사장으로서 각 노회 연맹 이사장에게 교회의 종을 바친 상황을 급히 조사해서 보고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그리고 6월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연맹 이사장으로서 ‘애국기 헌납 기성회’ 위원대표 정인과, 백낙준, 이용설, 오문환 등과 함께 조선군사령부를 방문하여 육군 환자용 자동차 3대 기금으로 2만 3221원 28전을 헌납했다.

1942년 9월 국민총력 조선연맹이 조선호텔에서 주최한 ‘기독교의 일본화 급무 간담회’에 감리교 박연서, 이동욱, 장로교 전필순, 정인과, 성결교 이명직 등과 함께 참석해 일본기독교단 통리 도미타로부터 기독교 각파의 통합을 권고받고 교파 통합을 논의했다.

종교단체법에 의해 일제 강점기 시대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1회 총회는 1942년 10월 16일 7시 30분에 평양서문외교회당에서 회집되었다. 직전 제30회 총회장인 최지화 목사(창씨 개명, 철원지화, 데츠바라 지까)는 먼저 필승 기원선언문 낭독 순서를 진행했다. 제31회 총회를 개회하기 전에 평강미수(전필순) 목사의 결의문 낭독에서 “천황의 덕분으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고, 그로 인해 세계 신질서를 완성한 것이 우리 제국의 국시”라는 말로 시작하였다. 총회장이 일제의 필승 기원선언문을 낭독하지 않고 평강미주(전필순) 목사가 낭독한 것은 총회장 최지화 목사가 일본어를 할 줄 모르자 일본 고베신학교에서 공부한 전필순 목사가 일본어로 낭독했다.

이러한 결의문을 선언한 후 개회예배를 드렸다. 개회예배는 직전 총회(제30회) 총회장인 최지화 목사가 설교를 해야 한다. 그러나 조촌승제 씨가 회장 개회 설교를 대독했다. 일본 경찰은 총회진행까지 간섭하여 일본어를 국어라 하고 국어, 즉 일본어로 회의 진행을 강요하여 일본에서 신학을 했던 조촌승제 목사가 총회장을 대신해 성경 본문 마태복음 9장 10~17절 말씀으로 ‘신출발’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대독했다.


광복 후 장로교단의 친일 행적에 대한 비판이 일면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 이사를 지낸 최지화도 목회 활동을 하지 못하고 평양신학교(교장 이성휘) 교수로 부임했다.

38선 이북 지역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종교 활동은 자유롭지 않았고, 집권당인 조선로동당의 지휘 아래 조선기독교연맹이 출범한 뒤 평양신학교가 감리교 계통의 성화신학교와 병합되어 조선기독교신학교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이때가 한국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3월이었으며, 곧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조선기독교신학교는 폐교되고 개신교 목회자들이 체포되어 최지화도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확한 사망 일시나 경위는 알 수 없다.

그는 3ㆍ1 운동 전후로 조선국민회, 안동현임시의사회와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공로로 1963년 대통령표창에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010년 서훈이 취소되었다).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개신교 부문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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