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동완 [玄東完, 1899~1963]
기독교인 사회운동가, 청년운동가, 호는 창주(滄柱)

【현동완과 YMCA】
현동완(玄東完, 1899~1963)은 1899년 6월 12일, 서울 마포구 현석동에서 출생하였다. 1916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1917년) 조선중앙 YMCA학관을 졸업하였다. 1918년 서울 YMCA 간사로 취임하면서 이후 별세하기까지 평생을 YMCA 간사를 역임하였다.
1920년 3월 30일, 현동완은 농구 선수 겸 감독원으로서 반하트와 함께 일본 도쿄 원정을 떠났다. YMCA 농구팀은 최초의 해외 원정 경기에서 2승 3패의 전적을 남겼다.
【클리블랜드 YMCA 수습간사】
1920년, 신흥우가 윤치호의 뒤를 이어 YMCA연합회와 서울YMCA의 겸임 총무로 취임하자, 인재양성의 필요를 통감하여 1921년 구자옥을 시카고 YMCA전문학교에서 2년간 수학케 하고 1922년 귀국과 동시에 서울 YMCA의 부총무로 기용하는 한편, 즉시 현동완을 선발하여 미국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YMCA에 수습간사로 파송하였다. 당시 클리블랜드청년회는 무디 이후의 YMCA 세계에 있어서 전도운동의 선봉이었다.
아마도 신흥우는 클리블랜드청년회야말로 현동완의 훈련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클리블랜드청년회에서의 수습 시기를 포함한 4년간의 미국 생활을 통해 그의 인생관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이 시절 퀘이커교도들과 깊이 사귀었고 또 아메리카를 여행하면서 벽지의 수도원을 방문하는 생활을 보냈는데, 수도원 중에서도 퇴락한 일인승(一人僧) 수도원을 즐겨 찾았다고 한다.
【평화구락부, “참”운동, 그리고 다석 유영모】
1926년 귀국한 그는 경건주의 운동을 태동시켰는데, 곧 YMCA 소년들로 구성된 “평화구락부” 클럽을 창설한 것이다. 매주 금요일에 정기집회를 갖고 평화의 이름 아래 개인적 수양과 사회봉사의 훈련을 받도록 했는데, 수련내용은 금요기도회, 등산, 도보여행, 근로봉사, 구제활동 등이었다.
1927년, 구자옥의 후임으로 중앙기독교청년회의 부총무가 된 이후, 평화주의적 사회봉사활동은 “참”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전 연령층을 망라한 서울YMCA의 가장 역점적인 종합적 프로그램이 되어갔다. 그의 간청으로 시작된 유영모(柳永模)의 “금요강화”는 이 운동을 정신적으로 뒷받침했으며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의 “동정메달” 구제활동은 지방으로 확대되면서 “참”운동이 점차 조선기독교청년회의 또 다른 지도노선을 형성해 갔다. 유영모의 평전을 지은 박영호는, “만약 현동완이 없었다면 유영모가 깨달은 진리가 시공 속에 묻혀버려 아는 이가 아주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다석을 세상 밖으로 소개한 사람으로 현동완과 김교신을 꼽았다.
【일제말기와 해방직후의 활동】
1930년 9월 19일, 제7회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에서 통계서기에 피선되었다. 아마도 YMCA가 연합공의회에 회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YMCA의 파견으로 공의회에 참석하였고, 공의회에서 임원으로 선정된 것으로 보인다. 1938년에는 YMCA 연합회에서 시무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잠시 YMCA를 떠나 함북지방에 은둔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는 본격적인 사회운동을 전개하여 1945년 미군정청 교통부장 고문이 되었다. 그리고 고려민주당 창당에 관여하였다.
1947년 브라질을 시찰하고 돌아온 그는 1948년 6월, 서울 YMCA 총무로 취임하여 1957년까지 활동하였다. 1949년에는 한국산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1949~1954년).
【삼동소년촌 등 사회사업】
한국 전쟁 이후 서울로 복귀하여(1952년), 부랑ㆍ범죄 소년을 위한 삼동소년촌, 윤락여성 선도를 위한 삼동부녀회관, 무산아동을 위한 무료중학교 등 복지사업을 서울YMCA의 주축 프로그램으로 시행하였다. 1953년에는 100만평이 넘는 난지도를 사들여 ‘보이즈 타운’이라고 불린 삼동소년촌을 설립하였다. 삼동소년촌은 소년들이 시장을 뽑고 자체은행권을 발행하는 등 유토피아적인 소년 자치도시였다고 한다. 난지도의 소년들은 1969년 물난리로 뿔뿔이 흩어졌다. 1956년에는 결핵환자 요양원인 송등원(松燈園)을 광주에 설립하였다.
【좌절과 투병, 세상을 떠남】
1955년경의 서울YMCA 회원과 이사 모두의 관심은 회관 재건에 쏠려 있었고, 때문에 그의 실천적 경건주의에 불만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가 회관 재건에 소홀했던 것은 아니다. 국내외 및 주한미군 등에 회관 재건 지원을 요청했지만 그 모든 노력이 성공을 거둘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실의와 피곤에 지친 그는 손수 두계(豆溪)에 수도를 위하여 마련한 오두막에 퇴거하여 휴양하는 시간이 늘어났고 결국 1957년 3월 총무직을 사임하였다.
1959년 12월, 그는 병으로 눕게 되어 난지동 삼동소년촌 단칸방에서 오랜 투병 생활을 하였는데, 1963년 10월 28일로 예정된 ‘서울 YMCA 60주년 기념식’이 있기 3일 전에 세상을 떠났다.
【기타】
그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보건사회부 장관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외에도 창녀전도사업, 우유급식사업, 동정메달주간 설정, 틈차여행(Traveling Comping)운동, 소년촌(Boys Town) 설립 등 다방면의 사회운동을 개척하였고 한국 개신교에서는 최초로 수녀원을 만들기도 하였다.
황광은(黃光恩) 목사는 그를 “20세기 종로의 성자”였다고 규정짓고 “분명 그는 그리스도에 미친 사람이었다. 그것도 천당 속에 높이 앉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하시는 주님께 미친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생애는 YMCA라는 봉사단체에서 시작되어 병으로 눕기 수개월전까지 40년간을 청소년지도에 그 몸을 바친 것이다”라고 추모하였다.
큰아버지인 현흥택(玄興澤) 씨는 구한말엔 군인으로서 전권대사 민영익(閔泳翊) 씨의 수행원으로 미국과 구라파 여행을 했으며, 1896년에 독립협회가 조직될 때에는 정령(正領)의 신분으로 창설에 많은 활약을 했다. 특히 1903년에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창설될 때는 자문위원직을 맡았고 1907년에 회관을 지을 때에는 대지 4백 평(현 서울YMCA 대지의 일부)을 기증함으로써 궁지에 빠져있었던 회관건축사업을 성공리에 추진시켰다. 현흥택 씨의 아들 동식(東軾), 동철(東轍) 등도 YMCA 위원으로서 초창기에 YMCA 육성과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대한감리회는 ‘광복 60돌 예배 자료집’에서 감리교인 가운데 독립운동을 해 건국훈장을 받은 김구, 민영환, 이승만, 이승훈, 신익희, 이준, 이시영, 안창호, 오동진, 서재필과 대통령장이 추서된 주시경, 양기탁, 이동녕, 이동휘, 이상재, 지청천, 이상설, 이위종, 이회영, 신채호, 박은식, 노백린, 유인석, 나석주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지만 훈장을 받지 못한 주요한, 현동완 등 100여 명을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