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한 [洪承漢, 1881~?]
장로교 목사, 선교사, 호는 온암(溫菴)
【방효원 목사와 홍승한】
홍승한(洪承漢, 1881~?)은 1881년 평북 철산에서 출생하였다. 기독교인으로서 1907년 평북 철산에서 조사로 활동하였다. 28세가 된 1908년에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28세의 청년 홍승한이 방효원 목사의 여동생인 방승화와 결혼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방효원 목사의 주선 덕분이다. 이로써 홍승한 목사는 방지일 목사의 고모부가 된 것이다.

29세가 되던 1909년, 철산군 백량면 영동(嶺洞)교회 초대 장로로 장립되었다. 이후 1911년에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제4회). 이듬해인 1912년 9월, 경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후 대구 남성정교회(南城町敎會, 현 대구제일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여 5년간 시무하였다.
【예수교장로회 제6회 부회장, 중국 산동 선교사로 파송】
1917년 9월 1일, 승동교회에서 열린 예수교장로회 제6회 총회에서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이어서 열린 경북노회 임시노회(9월 17일)에서 대구교회 목사 직무 사면과 중국 측 산둥독회(山東督會)로의 이명을 청원했다. 홍승한 목사가 있었던 대구 남성정교회는 이만집 목사가 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중국 산동 선교사로 총회 파송을 받아 중국으로 이주하였으며 먼저 파송된 방효원(方孝元) 목사와 1년 후에 재파송된 박상순(朴尙純) 목사 등과 함께 중단되었던 산동선교를 재개하였다.
1919년 2월 5일자 기독신보에 따르면, 그는 “중국에 온 지 1년 3개월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본국 여러 교회 형제 자매들의 기도로 영육간이 평안하다. 어학 실력이 아직 부족하지만 몇 달 전부터 중국어로 설교와 기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1921년, 남경에서 개최된 중국 장로교회 총회에 참석하여 산동선교의 현황을 보고하고 중국교회의 협조를 촉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1922년 선교지역을 분할할 때, 그는 즉묵(即墨) 지방을 담당하여 즉묵선교회 회장이 되어 크게 활약하였다.
【선교사직 사임 이후】
1923년에 자모교회를 세웠으며, 1925년에 본국 교회가 재정적인 이유로 산동선교를 축소하게 됨에 따라 그는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평북노회 선천남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1928년에는 철산읍교회로 전임되어 3~4년 봉직하였다.
1932년 9월 16일부터 17일까지 열린 제9회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에서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그 이후 이후 북만주 선교에 종사하였고, 해방 후 월남하여 부산 괴정동에 거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