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택기 [洪澤麒, 1893~1950]

홍택기 [洪澤麒, 1893~1950]


홍택기(洪澤麒, 1893~1950)는 1893년 5월 11일, 평북 선천군 산면 갑암동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고향의 유영재(流英齋)에서 한문을 공부하고 선천 명신학교에 입학하여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선천 신성중학교에서 공부하다가 2년 만에 중퇴했다.

1908년 8월, 기독교에 입문하였는데, 1910년 7월에 세례를 받았다. 1917년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3월에 전도사로 임명되었고, 1922년 3월에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그는 1925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제18회)하였다. 그런데 1924년 12월에 졸업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졸업 후에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는 규칙(規則)의 권위자란 칭호를 받을만큼 교회헌법 해석에 능통했으며, 평북노회 서기(31~34회), 평북노회장(37~38회)을 역임하였다.

1929년, 제18회 장로회 총회에서 회록서기를 맡게 되었다. 다음해(1930년)부터는 장로회 총회 서기가 되어 1936년까지 역임하였다. 1931년 평북노회 서기가 되어 1934년까지 서기를 역임하였다.

그는 선천군의 보신(保新)교회와 갑암(甲岩)교회를 거쳐 1932년부터 철산군 차련관교회를 10년 이상 담임하였고, 일제 말기에는 월곡교회를 담임하였다.

1937년 제26회 총회 부총회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1937년부터 1938년까지 평북노회장을 역임하였다.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개최된 제27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이 총회는 한국 장로교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총회로 유명하다.

1938년 9월 10일, 오전 9시 30분에 총회가 재개되었을 때는 교회당 안팎으로 사복경찰관 약 100명이 깔려있었다. 총회장은 찬송가 6장을 인도 합창케 하고 박응률 목사로 기도케 한 다음 히 12:1~2까지를 봉독하고 총회의 속회가 됨을 선언하였다. 계속해서 평안남도 지사인 이시라(石田千太朗)의 축사가 있은 후에 회무는 계속 진행되었다. 10시 50분이 되자 신사참배 결의안이 상정되었다. 이것은 조작된 각본대로였으며 평양ㆍ평서ㆍ안주 3노회의 연합 대표로서 평양노회장 박응률 목사의 이름으로 긴급제안이 되었다. 그러자 평서노회의 박임현 목사와 안주노회의 길인섭 목사의 동의와 재청이 잇달이 있었다.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이 안건이 가한 줄 알면 예 하시오”라고 물었다. 그리고 부는 묻지도 않고 그냥 만장일치로 가결을 선언해 버렸다. 선교사 총대를 비롯하여 “불법이오”라고 소리가 연이어 일어났으나, 그러한 발언을 한 사람들은 일본인 경찰관에 의하여 제지당하거나 또는 옥외로 축출당하였다. 이러한 소란 속에서 성명서는 채택되었다. 성명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我等(아등)은 神社(신사)가 宗敎(종교)가 아니오, 基督敎(기독교)의 敎理(교리)에 違反(위반)하지 않는 본의(本意)를 이해(理解)하고 신사참배(神社參拜)가 愛國的(애국적) 國家儀式(국가의식)임을 自覺(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神社參拜)를 率先(솔선)해서 勵行(여행)하고 追(추)히 국민정신(國民精神) 總動員(총동원)에 參加(참가)하여 非常時局下(비상시국하)에서 銃後(총후) 皇國臣民)으로서 赤誠(적성)을 다하기로 期(기)함”
右 聲明함 昭和 十三年 九月 十日
朝鮮예수敎長老會總會張 洪澤麒

이때에도 불법이라고 하는 공박이 또 있었으나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서기인 곽진근 목사로 하여금 굳이 낭독을 시켜 이를 완전히 확정시키는 방향으로 강행하였다.

이어 친일 어용기관인 평양기독교친목회에 소속하고 있던 평양노회 총대 심익현(沈益鉉) 목사는 특청으로 임원을 대표하여 부회장과 전 회원을 대표하여 각 노회장이 즉시 신사참배를 실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이것도 받아들여 그날 12시에 부회장 김길창 목사를 선두로 노회장 일동이 평양 신사에 참배함으로써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드디어 일본 우상에게 무릎을 꿇고야 말았고 신사참배 가결 총회장이란 오명을 홍택기 목사가 받아야 했다.

1938년 신사참배를 결의한 제27회 장로회 총회 임원들


신사참배를 결의한 이후 한국 장로교, 그리고 총회장이었던 홍택기 목사는 빠르게 일제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1938년 12월에 감리교의 양주삼, 장로회 총회 부회장 김길창, 성결교 이명직 목사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이세신궁, 야스쿠니신사 등을 비롯한 일본 신궁을 참배하고 돌아왔다. 1939년 9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평의원을 맡았다. 1940년 2월이 되어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평북노회지방 이사를 맡았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8월에는 징병제실시기념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했다.


홍택기 목사는 1945년 해방 후에 월곡교회와 철산군 참면 신곡(新谷)교회를 담임하였다고 한다. 해방된 해 11월 14일, 평안북도 일대의 여섯 노회가 연합하여 교역자 수양회를 홍택기 목사가 시무하고 있는 선천(宣川) 월곡동교회에서 회집하였다. 집회 석상에서 출옥한 이기선 목사의 신앙 간증이 은혜가 되었음은 다행이었다. 뒤이어 박형룡 박사가 한국교회 재건을 위한 기본원칙을 발표하였다. 그러했지만 이러한 재건의 열의가 냉정한 현실적 반대에 부딪혀 전혀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애쓴 사람이나 그 고생은 다 마찬가지였고 그리고 신사참배에 대한 통회자복이나 권징은 하나님과의 직접 관계에서 해결될 것이지 출옥성도라고 해서 그 어떤 사람이 강요해서 되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맞섰다. 이러한 반대론자의 앞장에는 신사참배 시행의 주모자였던 홍택기 목사가 또 한번 등장하고 있음은 역사의 모순을 느끼게 한다.

그는 1950년 한국전쟁 중에 공산당에게 연행되어 행방불명이 되었으며,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그에 대하여 민경배 목사는 아래와 같이 언급하고 있다.

“고난의 시대에 순교하는 이들의 모습은 고귀하고 거룩하다. 그러나 세상을 살면서 다가서는 엄청난 형극과 가시밭길을 그 현장에서 교회가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남는다. 홍택기 목사는 시련 속에서 교회가 겪는 자세는 단일한 것이 아니란 것을 보여주고 갔다” [☞ 2013.8.10. 한국장로신문/민경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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