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종률 [黃鍾律, 1887~1961]

구세군 사관, 제8대 사령관.


황종률(黃鍾律, 1887~1961)은 1887년 10월 29일, 경북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대구 계성학교에서 수학했으며 구한국 군대에서 복부하였다.

그는 한국 구세군의 개전 직후인 1908년 대구 군영에 입교하였다. 1910년 10월 2일, 그는 한국 구세군사관학교의 제1회 졸업생으로 참위로 임관하였고, 부인 권복형과 함께 서울 1영 담임보, 사관학교 교관으로 복무했다.

1914년이 되어 그는 영국의 만국구세군 총회에 참석하였고 그해 송파지방관리관이 되었으며 전라지방관을 보좌했다. 1918년 부인 권복형이 사망하였고, 1920년에 조경숙 사관과 재혼했으며 그해 해주 지방관에 임명되었다. 그 뒤에 이어서 개성ㆍ의성ㆍ충서ㆍ함강지방관을 역임했다. 1929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전장서기관(전도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34년에는 총무서기관에 선임되었다.


1940년에 서기장관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9월 29일에는 한국인 최초의 사령관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일제말기에는 한국 구세군이 일본 구세단에 강제 편입되었고, 그에 따라 일본인 사카모도에게 책임자 자리를 물려주었고 그는 총무부장으로 일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 말기에 구세군 지도자로서 일제에 협조한 행적이 있다. 기독교 교단이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고 국민의례, 황거요배, 국경일 경축 등에 동참했을 때 구세군의 신사참배 계획에 대한 담화를 발표했다.

1942년 조선종교전시보국회가 파견하는 순회강연반에 포함되어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유세를 편 일도 있다. 이때 황종률은 불교계의 혜화전문학교 교수인 김동화와 함께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지역을 순회했다. 1943년 11월 조선전시종교보국회라는 어용 단체에 구세군 대표로 참가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서,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종교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1945년 해방 후 구세군으로 환원될 때까지 구세교회 통리로 교단 재건을 지도하였다. 1947년, 구세군으로의 환원과 함께 로드사령관을 보좌하는 서기장관으로 활약하였다. 1949년 10월, 제4회 한국기독교연합회 회장이 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 때는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을 환영하는 개신교 행사 개최에 구세군 대표로서 참가한 일이 있다. 인민군이 후퇴한 뒤 부산으로 피난하여 한경직이 회장을 맡아 조직한 기독교연합전시비상대책위원회에 감리교의 유형기, 성결교의 김창근과 함께 부회장으로 참여했다.

1951년 9월 5일, 제5회 한국기독교연합회 부회장이 되었다. 그 이듬해인 1952년 10월 15일, 제6회 한국기독교연합회 부회장이 되었다.

1953년 10월 29일, 구세군사관 봉직 40년을 마치고 정령 계급으로 정년은퇴하였으며, 1961년 9월 26일, 별세하였다. 그의 장녀 황숙현 특무는 사회봉사에 관한 공적으로 1971년 한국 최초의 구세군 창립자 훈장을 받았다. 차녀 황소향은 경기도 안성군영을 선친의 기념사업으로 헌납하였다. 대중가요 작곡가 겸 평론가 황문평(황해창)의 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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