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블 [E. M. Cable, 1875~1949] 기이부(奇怡富)

케이블 [E. M. Cable, 1875~1949] 기이부(奇怡富)


기이부(奇怡富), 미국미감리회 선교사, 목사, 신학자, 교육가, 한글성경 번역가


케이블(Elmer Mannasseh Cable, 1875~1949)은 1875년 11월 12일, 미국 아이오와주 하단카운티 엘도라에서 조지 케이블(George Cribbs Cable, 1848~1926)과 사라 캐머리(Sarah Anna Kammary, 1850~1879) 사이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교육자로서 와이오밍주 서블릿카운티 장학관으로 봉직했다.

어려서 하버드로 이주하여 그곳 아이오와 코넬대학과 노스웨스턴대학, 뉴욕신학교를 졸업하고 캘리포니아 출신인 머틀 엘리엇(Myrtle Emma Elliott, 1877.12.31.~1969.10.9.)과 결혼하였다.

대학 재학 때 해외선교를 지원하여 1899년 노스웨스트 아이오와연회에서 집사목사 안수를 받고 인도로 파송될 예정이었지만 건강진단 절차를 밟지 못해 인도로 가지못하고 대신 한국으로 파송되었다. 부인과 함께 1899년 9월, 서울에 도착하여 배재학당 교사로 사역을 시작하였고 동대문교회 사역도 겸하였다. 당시 동대문교회는 매 주일 60여명 신도가 참석하고 있었는데 고사영과 이경직 등 한국 전도인들의 도움을 받아 목회사역에 임했다.


1901년 5월, 연회에서 황해도로 파송을 받아 김기범 전도사와 함께 순회전도에 나서 1년 동안 91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입교인 100명, 학습인 415명 신자를 얻었다.

1902년 평양에서 개최된 연회에서 무어(D. H. Moore) 감독에게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1903년 5월부터 안식년 휴가를 떠난 존스를 대신해 서부지방 감리사가 되어 경기도 인천ㆍ강화ㆍ교동ㆍ남양ㆍ부평, 황해도 연안ㆍ해주ㆍ신천ㆍ서흥 등지를 맡아 선교하였다. 1903년 연회에서 황해도 지역에서만 입교인 142명(22명 증가), 학습인 538명(163명 증가), 총 680명(185명 증가) 신자를 확보했다.

1904년 연회에서 지방 내 10개 구역, 63처 교회에 입교인 695명, 학습인 1,549명, 원입인 756명, 총 3천명 교인을 확보했음을 보고했다. 특히 1904년 11월 ‘원산부흥운동의 주역’ 하디 선교사가 인도한 부흥회가 인천 내리교회에서 개최되었던 바 교인들의 통회자복과 영적 각성이 이루어졌다. 현장에서 이를 목격한 케이블은 “이 놀라운 은총의 사역은 교회 안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영향은 교회 밖 지역사회로 확산되고 있다. 집회에 참석해서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교회 밖으로 나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우리 사역의 전반에 걸쳐 큰 부흥이 일어날 것을 확신한다”고 보고했다.

1905년 연회에서 지방 조정이 이루어져 경기도의 인천과 강화ㆍ교동ㆍ부평ㆍ남양, 충청도의 청주와 보은ㆍ충주ㆍ공주ㆍ연기를 묶어 한 지방으로 만들어 케이블 감리사에게 관리를 맡겼다. 이에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를 순회하며 교회와 교인을 관리하였는데 부인도 종종 지방여행에 동행하여 부인들을 대상으로 전도활동을 펼쳤다.

1906년 연회에서 지방 내 24개 교회에 학습인 1,914명, 입교인 828명, 총 2,742명 교인과 38개 주일학교에 교사 128명, 학생 2,022명을 확보했음을 보고하였다. 1년간 세례 준 사람은 173명이었다. 미감리회 기관지 「신학월보」 편집 업무도 맡았는데, 6월 연회 후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했다.

1907년 가을, 귀환하였다. 그가 참석하지 않았지만 1907년 6월 서울에서 개최된 연회에서는 케이블을 인천지방 감리사로 파송했다. 하지만 귀환 직후 인천이 아니라 공주로 내려갔는데 이는 공주선교부를 담당하던 스웨어러가 질병으로 수개월 동안 활동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년 만에 돌아본 선교지 상황은 크게 바뀌어 있었다. 1907년 여름 체결된 정미7조약과 구한국부대 강제해산으로 항일의병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이에 대한 일본 군경의 강경한 진압작전으로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경기도 강화와 이천, 충청도 목천ㆍ병천ㆍ경천ㆍ문의 등 의병운동이 일어난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이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살해당하거나 투옥되어 악형을 당했고 예배당과 교인 주택이 방화된 경우도 있었다. 이에 케이블은 피해를 입은 교회와 교인들을 순방하며 위로하였고 일본의 만행에 침묵하는 해리스 감독에게 항의를 표하기도 했다. 그런 중에도 1년 동안 340개 교회를 순방하며 전도한 결과 1만 8천 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남감리회와 미감리회 선교부 연합신학교로 설립된 협성성경학원(후의 협성신학교)에 교수로 파송되어 조직신학과 교회사를 강의하기 시작했다.

1908년 3월 연회에서 공주지방 감리사로 파송되었고, 선교사 연합잡지 The Korea Mission Field 공동편집인으로 참여하였다.

1909년 6월 연회에서 충청도 지역을 남북으로 나누어 충북지방 감리사로서 청주ㆍ진천ㆍ천안ㆍ문의ㆍ보은ㆍ두산ㆍ영동 등지 교회들을 맡아 관리하였다. 11월 1~2일, 미감리회 선교개척 후원자 가우처 박사의 내한을 기념하여 개최된 ‘미감리회 한국선교 25주년 기념’ 선교세미나에서 “미감리회 선교 약사”를 발표하였다.

1909년 미국 북장로회와 미감리회 선교부 사이에 충청 지역에 대한 선교지역 분할협정이 마무리되고 청주ㆍ문의ㆍ보은ㆍ연기 지역이 북장로회 선교부로 넘어감에 따라 케이블은 서울선교부로 옮겨 이후 협성신학교 사역에 주력하였다. 1907년 남북 감리회 연합신학교로 출발한 협성신학교는 3년 동안 서울과 개성을 옮겨 가며 수업을 하다가 1911년 봄 서대문 밖 냉천동 언덕에 3천여 평 부지를 확보하고 가을에 매물로 나온 창덕궁 규장각 건물을 구입해 옮겨다 지은 후 1911년 가을 학기부터 수업을 시작하였다. 협성신학교 1대 교장인 존스는 신학교와 한국선교를 위한 모금운동을 벌이기 위해 1908년 귀국했다가 3년째 돌아오지 못하고 있어 남북감리회 선교부는 케이블을 협성신학교 교장으로 선임하였다.


1911년 12월 20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협성신학교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하여 그동안 신학수업을 받아온 한국인 목회자 39명에게 졸업장을 수여하는 것으로 교장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 무렵 서울에서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의 또 다른 신학교로서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이 냉천동협성신학교 교사에서 수업을 시작하여 케이블은 자연스럽게 피어선성경학원 사역에도 참여하였다. 그 무렵 부인도 동대문 여선교부 안에서 진행되던 감리회부인성서학원(후의 협성여자신학교)에 나가 성경과 음악을 가르쳤다.

1912년 3월 연회에 신학교 교장으로서 “현재 1학년 67명, 2학년 44명, 3학년 44명, 4학년 30명, 총 194명이 수업을 받고 있으며 미국에서 보내온 갬블 부인 선교비로 본관 신축공사를 시작할 예정이다.”고 보고하였다. 1912년 연회에서 케이블은 협성신학교 교장 외에 서울 종로교회(중앙교회) 담임으로 파송되어 목회도 겸하였다.

1913년 협성신학교 장정과 규칙을 새롭게 정비하였는데 거기서 신학교육 이념에 대하여 “우리의 참된 이상은 신학생들의 인격적 가치와 성품을 영적으로 더욱 증진시키는데 있다. 모든 학생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를 맺으며 성령의 능력 안에서 더욱 풍성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와 동시에 학문적 소양과 지식을 충분히 쌓아 복음 전도자로서 현장에 나가 사역하기에 충분한 실력을 갖추도록 도와줄 것이다.”라고 정리하였다.

1913년 2월, 장로교회인 서울 승동교회 새 예배당 봉헌식에 미감리회선교부 대표로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다. 곧이어 봄에 제2차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했다. 그러면서 협성신학교 교장직은 남감리회의 하디에게 넘겨주었다.

휴가를 마치고 1914년 가을 서울로 귀환한 후에는 협성신학교 평교수로 강의하였고 부인은 신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1915년 9~10월, 서울에서 열린 산업박람회를 기해 전국에 흩어져서 사역하던 대영성서공회 권서들이 서울에 모여 대전도집회를 열었다. 이를 계기로 선교연합공의회에서 권서들을 위한 신앙수련회를 개최하였던 바 케이블도 강사로 참가해 “기도생활”이란 주제로 강의하였다.

1916년부터 대영성서공회의 한글성경 개역작업에도 참여하였다. 1916년 2월에 창간한 신학교 기관지 「신학세계」 편집인으로 참여하여 교회사와 감리교 신학에 관한 논문들을 다수 연재하였다.

1917년 「신학세계」에 연재한 글을 묶어 단행본 『성디지(Geography of the Holy Land)』으로 출판했다. 같은 해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연희전문학교, 외국인학교 교사들과 함께 내한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서울외국어학교를 설립하고 초대교장으로 봉사하였고, 모교인 노스웨스턴대학으로부터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러시아의 전후 복구작업을 지원하려는 미국정부의 지시로 1918년 11월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1년동안 적십자사와 기독교청년회(YMCA) 봉사활동을 하고 돌아왔다.

1919년 11월, 서울 정동교회에서 개최된 미감리회 연회에 참석해서 그동안 일어난 3ㆍ1독립운동으로 인한 교회와 학교, 목회자와 교인들의 ‘비참한’ 피해상황을 확인하였다.

1920년 2월 12~16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미감리회 동아시아 총회에 한국교회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하였다. 곧이어 4월 7~11일 정동교회에서 개최한 청년대전도회에 이상재ㆍ신흥우ㆍ김종우 등과 함께 강사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여름에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하였다.


그는 192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추진한 한글성경 개역 작업에 참여하였다.

1921년 가을, 귀환하여 협성신학교 교감으로 사역에 복귀하였다.

1922년, 「신학세계」에 연재한 글을 묶어 단행본 『미감리교회도례(Doctrines and Discipline of M. E. Church)』으로 출판했다.

1924년 3월 8일, 협성신학교 학우회 주최로 신학교 강당에서 ‘기이부 박사 선교 25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는데 김광식 목사의 사회로 최병헌 목사의 약력 보고, 김창준 목사의 기념사에 이어 신학생들이 신선로 1좌, 수원 삼일학교 학생들이 은수저 1점, 정동교회 교인들이 촛대 1좌를 기념품으로 증정했다.

1925년, 협성신학교 동료 교수로 사역하던 최병헌과 함께 한문을 선호하는 지식인층을 겨냥한 『선한문 창세기(鮮漢文 創世記)』를 간행하였다. 1925년 1월에는 미감리회 선교사 무어(문요한), 북장로회 선교사 홀드크로프트(허대전)와 함께 평북 영변지방 사경회를 인도하여 많은 개종자와 회심자를 얻고 돌아왔다.

1927년부터 다시 협성신학교 교장직을 맡게 되었다. 그해 5월, 최병헌 목사가 별세하여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거행된 장례식에서 추모사를 하였고 KMF에 영문으로 최병헌의 일생을 소개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7월에 「동아일보」가 본사 사옥 낙성기념으로 교육공로자 20명을 선정하여 표창하였는데 거기에 포함되어 표창을 받았다.

1928년 1월,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하였다.

1929년 안식년에서 귀환하면서 해외선교에 관심이 많은 조카(Shirley Cable)를 데리고 왔다.

귀환 후 협성신학교 교장직에 복귀하여 강의와 집필을 재개하였다.

1930년 6월 9~15일, 기독교청년회가 주최한 전도대강연회에 이용설ㆍ변성옥ㆍ백낙준ㆍ김창제ㆍ신공숙 등과 함께 강사로 참여하였다. 12월에는 기독교조선감리회 총회에 총대로 참석하여 영문서기로 활약하였다. 총회 조직 후 중부연회 정동교회 소속으로 협성신학교 교장을 계속 맡았다.


1931년, 「신학세계」에 연재한 글을 묶어 단행본 『히부리 종교사(A History of the Hebrews)』으로 출판했다.

협성신학교는 1928년부터 협성여자신학교와 실험적으로 ‘남녀공학’ 수업을 실시하며 두 학교의 통합을 모색하고 있었다. 두 신학교 이사회는 3년간의 실험 끝에 1931년 12월 합동을 결의하고 1932년 봄 학기부터 남녀공학의 ‘감리교신학교’로 출발하였다.

통합 신학교로 출발한 첫 학기에 신학생들의 ‘기이부 교장 배척 동맹휴학사건’이 터졌다. 학생들이 내건 이유는 “기이부 교장이 채플시간에 눈을 뜨고 기도했다”는 것이었지만 통합 후 신학생과 선교사 교수진 사이에 갈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결국 학생동맹을 주도한 최용신이 정학을 맞았고 케이블도 교장직을 사임하고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옮겨 갔다. 이후 수표교교회로 소속을 바꾸었고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영어와 성경을 강의하며 종교부 활동을 지도하였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부부가 함께 음악부 활동을 지도하였으며 부인은 이화여자전문학교 영어성경공부반도 지도하였다.

1935~1936년 안식년 휴가를 다녀왔다.

1937년 12월 7일, 제14회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 회계에 선임되었다.

그는 남장로회의 레이놀즈와 함께 성경 개역작업을 마무리하고 1937년 『개역한글판 신구약전서』를 인쇄하였다.

1938년 안식년 휴가를 다녀온 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사역을 계속하면서 싸이클부를 창설, 학생들의 체육활동을 지도했다.

1940년 11월, 다른 선교사 가족들과 함께 미국 정부가 보내온 후송선 마리포사호를 타고 귀국하였다.


귀국후에는 부인의 고향인 캘리포니아 산 레안드로와 헤이워드 사이에 있는 알마에다카운티 병원 근처에 거처를 마련하고 후버진공청소기회사 일을 도와주며 샌프란시스코간호학교에 들어간 조카 셜리의 학업을 뒷바라지하였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으나 이미 은퇴 나이가 지나 한국에 귀환하지 않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지냈다가 1949년 12월, 74세로 별세하여 캘리포니아 퍼시픽그로브의 엘까르멜로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아내는 1969년 10월, 91세로 별세하여 남편 옆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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