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석칠 [玄錫七, 1880~1943]

현석칠 [玄錫七, 1880~1943]

감리교 목사, 독립운동가, 이명은 현낙원(玄樂園)


현석칠(玄錫七, 1880~1943)은 1880년 1월 23일 평안남도 용강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대영성서공회에서 지원을 받는 ‘매서인’이 되어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성경책을 팔며 전도했다.

1910년 미감리회 전도사로 해주읍교회에 부임하여 목회를 시작하였고, 1911년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제1회)하였다. 당시 졸업생으로는 최병헌ㆍ전덕기ㆍ정춘수 등이 있다. 이후 서울 동대문교회로 전임되었다.

1912년 3월 10일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집사목사로 안수받았고, 평양 남산현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1914년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고, 1917년 8월, 공주읍교회(현 공주제일교회)를 담임하였다. 1918년에는 조선예수교장감연합공의회에 미감리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자 3월 24일, 공주 영명학교 교사 김관회, 이규상, 현언동, 졸업생 김사현, 학생 오익표, 안성호 등과 공주 만세시위를 추진하는 한편 공주만세운동을 김관회에게 맡기고 자신을 서울로 올라와 3ㆍ1운동 이후 계속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한성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3월 중순부터 이규갑ㆍ박용희ㆍ장붕 등 기독교인과 천도교의 안상덕, 불교의 이종욱, 유교의 김규 등과 함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대회를 준비하는데 기독교측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이 일을 위해 4월 19일 600원을 내놓았고(천도교의 안상덕도 600원을 희사함), 민강(閔橿) 등과 함께 국민대회 때 쓸 「임시정부 선포문」, 「임시정부령」을 비롯한 취지서ㆍ결의문ㆍ약법 등을 인쇄하였고 마침내 4월 23일, 서울 시내 각처에서 만세시위와 함께 임시정부 선포식이 베풀어졌다.

그는 공주 만세시위와 관련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8월 2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나게 되었다.

1919년 9월에 열린 연회에서 평양 남산현교회로 다시 파송되어 다른 어느 곳보다 많은 피해를 입은 남산현교회와 평양 지역을 회복시키는 일에 나섰다. 이후 10월 14~15일, 평양 장대현예배당에서 개최된 제3회 장감연합협의회 서기로 봉직하였다.


1920년 3월 초 철원 애국단 사건에 연루되어 몇달간 감옥에서 미결수 신분으로 갇혀 있다가 풀려났다. 출옥 후 영변읍교회, 강서읍교회로 전임되었다.

1921년 9월 수원지방 감리사로 전임되었으며, 9월 22일 평양 남산현교회당에서 열린 제5회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에서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1926년 영변읍교회에 부임하였고, 1929년 영변지방 감리사를 역임하였으며, 1930년 평양 신양리교회로 옮겼다.


1931년 신창(新倉)교회를 담임하여 신창지방 감리사가 되었고, 1933년 5월, 평양 유정(柳町)교회로 전임되었는데, 유정교회에서 1934년 12월 18일 교역 25주년 기념식을 주최하였다.

1935년 자원 퇴회(退會)하여 본처목사가 되었고 한때 평양 서문밖에 「신흥여관」을 개업하기도 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만주로 건너가 만주선교연회에 입회하여 북만주 사평가(四平街)교회를 담임하였다.

1941년 친일 어용교단인 만주기독교회가 출범하는 것을 계기로 목회에서 은퇴하였고, 1943년 9월 23일, 55세에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그는 2004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만주 용정 교외 기독교 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던 유해를(그의 묘소 바로 옆에 일본에서 옥사한 민족저항시인 윤동주의 유해가 묻혔다) 국내로 봉환하여 2005년 10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그의 여동생 현덕신(玄德信)은 의사로 YWCA 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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