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탁 [洪淳倬, 1878~1949]
감리교 목사, 교육가, 호는 오암(梧岩), 상동교회 3번 부임(8, 12, 19대 목사)
【출생부터 1910년까지】
홍순탁(洪淳倬, 1878~1949)은 1878년 9월 28일 황해도 연백군 해성면 오암촌에서 홍종만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한학을 수학하였고, 성장 후에는 한문서당 훈장으로 활동하였다.
1900년, 황해도 연안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하던 미감리회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고, 1901년 해주읍으로 이주한 후 해주읍교회(후에 남본정교회) 창설에 참여하였다.
1903년에는 미감리회 선교사 크리체트(C. Critchett)와 함께 해주 서지방 순회전도에 종사하였고, 1906년 해주읍교회에서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하였다. 1910년에는 백천(白川)교회로 전임되었다.
【1911년부터 1920년까지】
1911년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제1회)하고, 1912년에는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백천의 창동학교 교장직도 맡았다.
1913년 해주읍교회에 부임하여 교회당을 신축하였고, 1916년에는 서울 상동교회에 부임하여, 상동교회 안에 있는 공옥학교 교장직을 겸임하였다.
1918년에는 서강교회로 옮겨 의법학교 교장직도 맡았으며, 1919년에는 동대문교회로 옮겨 흥인배재학교 교장직을 겸임하였다. 그는 3·1 운동에 참여했으나 장기 투옥을 면하게 되어 재감자(특히 목회자) 가족 구호에 힘썼다.
1920년 10월 12~13일,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열린 제4회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에서 통계표 서기로 선출되었다.
【1921년부터 1930년까지】
1924년, 상동교회에 부임하여 5년간 시무하였고, 9월 24일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제1회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에서 서기로 선출되었다. 이때 그는 미감리회 조선연회 대표로서 감리교 협성신학교 이사로 활동하며, 신학교 강사로 요한계시록을 강의하였다. 또한 〈예수행적도〉라는 성화를 그려 부흥회를 인도하며 ‘시청각부흥사’로 이름을 알렸다.
1925년 9월 23일, 경성 수표교회에서 열린 제2회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와 1926년 9월 21일, 경성 정동미감리회예배당에서 열린 제3회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에서 각각 서기로 선출되었다.
1929년에는 인천 내리교회에 부임하며 인천지방 감리사로 임명되어 인천지방 교회를 관할하였다.
【1931년부터 1940년까지】
1931년 5월, 인천지방회 주최로 홍순탁 목사 교역 25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으며, 내리교회에서 한국 최초의 《간이선한문 신약전서》를 펴냈다. 이 성서는 종래 유성준이 펴낸 《국한문 신약전서》(1906)의 난해한 점을 개선한 것으로, 이후 사용되는 국한문 성서의 기초가 되었다.
그 후 홍천읍교회에 부임하여 홍천지방 감리사로 활약하였고, 1933년에는 영변지방 신창교회와 일신학교 교장직을 맡았다. 1935년에는 해주 남욱정교회에 부임하여 시무하였다.
【1941년 이후】
1941년 강원도 철원교회를 담임하였고, 1943년 서울 청파교회에 부임하였다. 1946년에는 상동교회에 세 번째로 부임하여, 일제 말기에 ‘황도문화관’으로 사용되던 예배당을 복구하고 교회 재건에 힘썼다. 또한 폐쇄되었던 공옥학교도 다시 복구하였다.
1947년 3월 15일, 과로로 쓰러져 별세하였다. 장례는 상동교회장으로 엄수되었으며, 유해는 경기도 고양군 벽제에 안장되었다.
홍순탁의 장남인 홍은표(洪殷標)는 한국전쟁 당시 맹인이 된 후, 맹인들의 자립과 복음 전도를 위한 ‘오암원’(梧岩園)이라는 맹인선교단체를 설립하였으며, 세 딸(해은, 광은, 동은)은 상동교회에서 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