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트모어 [N. C. Whittemore, 1870~1952] 내한선교사

내한선교사 휘트모어(N. C. Whittemore)


위대모(魏大模), 미국북장로회 선교사, 목사, 교육가


휘트모어(Norman Clark Whittemore, 1870~1952)는 1870년 6월 7일, 미국 뉴욕주 브루클린에서 에드워드 휘트모어(Edward Payson Whittemoe, 1836~1899)와 캐롤라인 로더(Caroline Amelia Loder, 1839~1923)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1886년, 인디애내주 캔사스의 파크(Park)대학을 졸업하였고, 1888년에는 그린위치대학교(University of Greenwich)를 졸업하였으며, 1892년에는 예일대학을 졸업하였다. 이후 그는 1895년 유니온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아 페이(Pye)시에 있는 장로교회에서 목회를 담당하였다. 한편 그는 예일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였다(1895~1896년).


1896년, 북장로회 웨스트체스터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같은 해 3월 25일, 뉴 헤븐 콘(New Haven Conn)에서 선교사 임명을 받았으며, 10월 21일에 내한하여 평양선교부에 배속되어 평양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였다. 이어서 그는 2주간 리(G. Lee)와 함께 황해도 구역을 탐방하고 엘린우드(Ellinwood)에게 한국의 북부지역 전체를 자신이 맡게 해달라고 편지를 보내 평북지역 개척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1897년 봄, 선천을 방문하여 노효준ㆍ나병규ㆍ조규환 등 3명의 신자와 함께 석장동에 선천읍교회를 개척하였다. 5월에는, 베어드(W. M. Baird)와 함께 의주ㆍ삭주ㆍ선천을 중심으로 하는 평안북도 서쪽 교회들을 처음으로 순회하였고, 평양선교부 총무로 임명받아 각 지역 교회 통계조사 및 성경공부반의 원활한 운영을 모색하기 위해 1898년 말까지 평북지역 교회들을 세 번이나 순회 방문하였다.

1898년 8월, 선천읍교회에서 14명의 신자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리고 12월에는 마펫(S. A. Moffet)과 함께 75명이 참석한 가운데 첫 사경회를 개최하였다.

평양선교부가 1898년 12월에 선천에 새로운 선교부를 설치하고 휘트모어, 샤록스(A. M. Sharrocks) 의사 부부와 마가렛 베스트(M. Best)를 배치하기로 결정하자, 1899년 4월 선천선교부를 시작할 것을 고대하면서 ‘허니문’으로 알려진 사택을 구입하였다. 또한 이 해에 평양 숭실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선천선교부가 세워진 후 평북지역을 7개의 순회구역으로 나누어 전도활동을 하였는데, 휘트모어는 중앙순회구역(선천군ㆍ구성군), 의주서부순회구역(서의주), 의주동부순회구역(동의주), 북부순회구역(삭주ㆍ창성ㆍ벽동) 등 4개 구역을 담당하였다.

1900년 남만주지역에 의화단사건으로 교회가 파괴되자, 안승원과 함께 만주를 방문하여 교인들을 위로하고 교회를 재건하였다.


1901년 10월, 미리 준비한 숙소에 샤록스 부부와 함께 입주하여 선천선교부를 정식으로 개설하였다. 선천군 지역에 대한 복음전도 결과 1901년 선천군 지역의 기독교 공동체가 32개, 세례자 677명, 교인 2,320명이나 되었다. 평북지역 교세의 증가로 북부순회구역에 새로운 선교부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1901년 렉크(George Leck) 선교사가 강계를 방문하던 중 천연두에 걸려 별세한 12월에 처음으로 강계를 방문하였다.

1902년 2월, 양전백 조사를 평북 최초의 장로로 임명하였다. 43일 동안 강계지방을 여행한 후 새로운 선교부로 강계를 제안하였다. (1904년 초 한국선교회의 승인을 받아 1908년 6월 강계선교부를 설치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선천군 전 지역의 교세확장과 발맞추어 1903년에 선천읍교회도 신도 수가 500명으로 증가하여 선천읍 인구의 10%에 이르렀다. 신도수가 급증하자, 1906년 7월 5일에 새 부지를 마련하여 수용 인원이 최대 2천 명에 이르는 교회당을 건축하였고, 1911년에는 선천읍을 가로지르는 시내를 중심으로 선천읍교회를 선천북교회와 선천남교회로 분립하였다.


1906년 5월 17일, 뉴욕 출신의 마우드 파슨스(Maud Wellesley Parsons, 1872~1950)와 결혼하고 8월 8일, 아내와 함께 내한하였다.

1906년 동역자였던 샤록스와 함께 선천읍교회 옆에 명신학교를 설립하였다. 명신학교가 졸업생을 배출하자 선천지역에서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중등학교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06년 9월, 양전백과 한국인 지도자들이 선천에 중등교육기관으로 신성학교를 설립하자, 휘트모어가 초대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1909년 파크대학 출신의 매큔이 선천선교부로 부임하여 신성학교 교장직을 맡을 때까지 3년간에 걸쳐 학교의 기초를 놓았다. 신성학교를 통해 백낙준, 박형룡, 박윤선, 방지일, 선우훈, 박치의 등 교계와 사회의 수많은 인재들과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되었다.


1907년 보성여학교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1909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회로부터 신성학교 정식인가, 선교부의 후원으로 교사와 기숙사를 신축하였고, 9월에 조지 매큔에게 신성학교 교장직을 이양하였다.

1912년 평북노회가 설립되었을 때 초대 노회장에 피선되었다. 1917~1918년 안식년을 다녀온 그는 1918년 평북노회에서 의산노회가 분립되자 의산노회의 초대 노회장에 추대되었고, 북장로회 실행위원회 의장으로도 수고하였다.

1920년 10월 12~13일, 개성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개최된 제4회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에서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1921년 9월, 매큔이 (아들의 심장병 치료를 위해) 가족과 함께 귀국하자, 1921년부터 1924년 5월 미국에 돌아가기 전까지 신성학교 교장직을 다시 맡았다.

1924년 5월, 안식년 때에 휘트모어의 건강 문제로 잠시 북장로회 선교사직을 사직하였다. 안식년이 끝나고 1926년 다시 내한하여 서울선교부로 배속되었다.

1929년 조선예수교서회의 행정총무로 본윅(Bonwick)과 함께 문서선교운동을 주관하였다.

1933년 11월 10일, 아들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4개월간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이후 1934년 귀환하여 5월 29일 휘트모어 목사 기념 정문 낙성식 및 개초식에 참석하였다. 이어서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열린 한국선교 50주년 기념식에서 강연하였다.

1935년 부인의 건강문제로 미국으로 귀국하였고, 1938년에는 본인의 건강상 이유로 은퇴하였다.

1950년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서 거주하던 중 1950년 10월 27일, 부인이 77세로 별세하였다. 부인과 사별한 후 1952년 5월 15일, 버클리에서 81세로 별세하여 뉴욕주 라이(Ray)의 그린우드 유니온(Greenwood Union) 공원묘지에 부인과 함께 안장되었다.


부인 마우드 파슨스(Maud Wellesley Parsons, 1872.10.30.~1950.10.27.)는 의주와 선천에서 가정들을 방문하며 선교활동을 하였고, 1910~1913년 보성여학교 체이스(M. L. Chase) 교장이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 매큔 부인(Mrs. McCune)과 함께 교장 대리로 재직하였다.

1911년에는 선천에서 새뮤얼스(Samuels)와 샤록스 부인(Mrs. Sharrocks), 밀러 부인(Mrs. Miller) 등과 함께 여성들을 위한 성경공부반을 개설해 교육하였고, 보성여학교에서 계속 교사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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