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택권 [林澤權, 1885~?]
장로교 목사, 제14회 장로회 총회장
소안론 선교사와 임택권 목사
임택권 목사(林澤權, 1885~?)는 1885년 2월 24일, 황해도 안악군 안악읍 서산리(瑞山里)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00년에 소안론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다. 임택권은 소안론 선교사의 권유를 받아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그는 1902년 소안론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그의 신앙성장에 기대를 건 소안론 선교사는 자신이 인도하고 있는 달성경학교(月聖經學校)와 사경회(査經會)에 열심히 참여하도록 권유했다. 그 결과 그는 소안론 선교사에게 지도자가 될 소양을 인정받고 소안론 선교사의 당회구역을 보살피는 조사(助師)로 채용되어 소안론과 함께 순회조사(巡會助師)의 일을 감당하게 되었다.
소안론 선교사는 그의 조직적인 사고와 두뇌를 인정하게 되었고, 또 그의 적극적인 복음사역의 능력을 인정해 그를 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안신학교(安信學校) 교장(1908~1909년)으로 임명하여 일하게 하였다.
목사안수, 은율읍교회, 코오베신학교, 서부교회, 이적증명회
그는 5년간의 신학교육을 이수하고 1914년 6월에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제7회). 신학교를 졸업하던 해 황해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황해도 은율군 은율읍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은율읍교회는 독립운동가 우종서 목사(평양 장로회신학교 제3회 졸업)가 목회하던 곳이다.
임택권 목사는 1918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코오베(神戶)신학교 선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특별히 미국 선교사 홀튼(Fulton) 교수의 정통신학(正統神學)에 매력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후일에 고백하였다. 그는 1년 후인 1919년 코오베(神戶)신학교 선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1920년 7월, 황해도 재령군 재령읍 서부(西部)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21년 7월, 임택권ㆍ장홍범ㆍ유만섭ㆍ오득인ㆍ김용승 등은 이적증명회란 것을 만들고, “진리의 말씀을 세상 학설에 붙이며 하나님의 권능을 마음 가운데 의심하던 자들의 참회와 신앙”을 위해서, 김익두의 이적 사실들을 수집하여 《이적증명서》란 책자를 발간하였다.
제14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1924년)
1922년 황해노회장을 역임한 그는 1924년 재령 명신(明新)고등학교 교장을 겸임하였으며, 그해(1924년) 9월에 개최된 제14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제14회 장로회 총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결의하였다.
① 지금까지 지켜오던 꽃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변경해 부르기로 하다. ② 미션학교(Mission School)는 반드시 교목을 두어 성경을 가르치기로 하다. ③ 중학교에는 목회자 자녀들이 입학할 경우 수업료(修業料)를 면제해 주는 일을 적극적으로 확대하기로 하다. ④ 장로교와 감리교 외에 다른 교파로 이적해 가는 교인들은 제적하기로 하고, 철저한 장로교회 요리문답 교육을 실시하는 등 교인 관리에 철저를 기하기로 가결하였다. ⑤ 한센씨병 근절을 위한 근멸회를 조직하기로 하다. ⑥ 간도노회를 동만노회(東滿老會)로 이름을 변경하기로 하다. ⑦ 함북노회(咸北老會)를 분립(함북ㆍ함중)키로 하다. ⑧ 불신자를 위한 목사의 결혼 주례는 불허하기로 하다. ⑨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재단법인화 하기로 하다. 여기에 최초로 한국인 남궁혁 박사를 장로회신학교 신약학 교수로 취임하는 일을 허락하였다. 남궁혁 목사는 미국 남장로교회에서 직영하는 리치몬드 유니온신학교를 졸업 하였던바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취임을 하게 되었다.
1926년, 그는 명신고등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서부교회에만 전념하였다. 1929년 12월, 평양 평양 장로회신학교 연구과를 수료하였다. 한편 그가 목회했던 은율읍교회에는 1936년에 평양장로회신학교 제28회(1933년) 졸업생 정재호(鄭在浩) 목사가 부임하였다. 임택권 목사는 이후 1939년 신천군 사평교회로 옮겨 시무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행방불명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는데, 전쟁의 와중에 1.4후퇴시에 월남한 장로교 목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임택권 목사는 조선기독교연맹(朝鮮基督敎聯盟)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산당에 의해 숙청되고 학살당하였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임택권(林澤權) 목사의 딸 임인옥(林仁玉) 씨는 아버지의 신앙을 이어받아 재령읍 서부교회 주일학교 교사를 맡고 있었는데, 신앙을 지키려다 18세의 나이로 총살당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