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유지 [裵裕祉, 1868~1925]

【경건한 장로교 가정의 배유지】
배유지(裵裕祉, 1868~1925)의 본명은 유진 벨(Eugene Bell)이다. 그는 1868년 4월 11일, 4월 11일, 미국 켄터키주 셸비카운티 스코츠 스테이션(Scott Station, Kentucky)에서 윌리엄 헨리 벨(William Henry Bell, 1836~1918)과 프랜시스 배너블(Frances Venable Scott, 1841~1910)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경건한 장로교 가정이었다.
그는 1889년 켄터키주 리치먼드에 있는 센트럴대학(Central University)에 입학하였고, 1891년 5월, 센트럴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하였다. 그리고 센트럴대학의 임시 신학과정에서 1년간 수학하였다. 그는 1892년 5월, 버지니아 유니언신학교로 전학하여 1년간 공부하였고, 1893년에 정식으로 개교한 루이빌신학교로 이동하였다.
1893년 5월 16일, 루이빌노회에서 목사안수 자격을 취득한 그는, 그해 11월 13일에 남장로교 한국선교사로 임명받았다. 1894년 4월 18일, 남장로회 루이빌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그는 5월에 루이빌 신학교에서 신학사(B.D.)를 취득하였다.
【1894년, 로티 위더스푼과 결혼하다】
1894년 6월 26일, 유진 벨은 센트럴대학교와 루이빌신학교 스승인 토마스 드와이프 위더스푼(Thomas Dwight Witherspoon, 1836~1898)의 딸, 로티 위더스푼(Charlotte Ingram Witherespoon, 애칭으로 Lottie, 1867.5.13~1901.4.12)과 켄터키 리치몬드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로티는 테니시주 멤피스 출신으로, 버지니아에 있는 어거스타여자신학교(Augusta Female Seminary)를 졸업였다. 로티도 유진 벨과 함께 1893년 11월 13일에 남장로교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었는데, 아마도 두 사람은 결혼 전에 이미 한국선교를 약속하고 함께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로티의 아버지가 루이빌신학교 교장이었다고 알려져 왔지만 이는 근거가 없다. 그는 버지니아 대학교 교목(1871~1873)을 거쳐, 버지니아 피터스버그의 탭 스트리트 장로교회 목사(1873~1882)와 켄터키 루이빌 제일장로교회 목사(1882~1891)를 역임하였고, 그 후 센트럴대학교에서 성경 및 기독교 변증학 교수로 봉직하였으며(1891~1892), 1892년에 교수직을 사임하고 리치몬드 제일장로교회 담임목사(1892~1894)로 일하였다. 1894년부터 1898년에 사망할 때까지 루이빌 신학교에서 설교학 및 목회신학 교수로 일하였다.
【1895년, 남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도착하다】
1895년 2월 12일, 유진 벨과 로티는 오세아닉(Oceanic)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출항하여 4월 9일(화요일) 서울에 도착하여, 동료 선교사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Dixie에 여장을 풀었다. 남장로교 해외선교위원회는 청일전쟁의 여파로 인해 유진 벨 선교사를 한국 대신 중국으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가 한국선교부의 강력한 반발로 결정을 번복하고 원래대로 한국으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곧바로 선교 현장으로 가지는 않고 서울에 머물면서 어학을 배우는 데 주력하였다. 이후 6월 10일 개최된 연례선교사 회의에서, ‘전위렴과 유대모는 군산으로, 최의덕 남매는 전주로, 이눌서와 배유지 그리고 장차 도착할 의사는 목포로’ 결정하였다.
【을미사변 이후 배유지 목사의 조선에 대한 인상】
배유지 목사는 조선의 정치적 회오리 속에서 복음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소신을 더욱 굳혔다. 그의 눈에 비친 조선의 임금과 정치인들은 참으로 한심하였다. 을미사변으로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사람들이 자연히 배유지 목사의 신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왕은 지금도 러시아 공사관에 계시므로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백성들은 임금이 그곳에 가 계신대 대하여 몹시 불만스러워한다. 한국은 스스로를 다스릴 힘이 없는 덧 하다… 내가 전해들은 정보가 틀리지 않는다면 한국의 관직을 맡은 관리들에게는 정해진 급료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아는 상당히 많은 관리들에게서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럼에도 관리들은 자신과, 가족과, 친척들까지 많은 하인을 거느리고 살이 비대해지게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이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견딜 수 없는 방법으로 백성들을 ‘쥐어짜지면’, 오로지 오랫동안 견디어온 한국인만이 이 쥐어짜기를 견딜 수 있다.”
1895년 여름 콜레라 퇴치 활동에 참여했던 공로를 표창하는 의미에서 고종은 배유지 목사에게 강화도 화문석을 연말에 보내왔다. 그리고 단발령과 평상복의 색깔을 하얀색에서 검정색으로 변경토록 명하였다가, 명성황후의 국상발표 후 다시 하얀색으로 바꿔입으라고 어명을 내린 것이 백성들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움을 주는가를 피부로 느꼈다.
당시 관료들의 부패에 대하여 이런 기록을 남겼다. “이 백성들에게는 복음 이외에 결코 다른 희망은 없다. 그들은 상당한 기간 정치적인 독립을 얻지 못할 것 같다. 관리들은 너무나도 부패해 있으며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1896년, 나주에 선교부 개척하기로 결의하다】
배유지 목사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 파송을 받아 1895년 서울에 도착하여 전남선교부가 설치된 나주군에 부임, 그해 9월 6일 나주읍에 최초의 장로교 「나주장로교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이곳 양반세력의 텃세가 심하고 외국인에 대한 반발이 대단하여 정착할 수 없었다.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이 있던 바로 그날 배유지, 이눌서 목사는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목포의 선교부 부지를 구입하기 위하여 항해하였는데, 그 배에는 춘생문 사건에 연루되어 귀향가는 면식있는 조선인이 있었으며, 그 죄인이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받기도 하였다. 두 사람은 목포에 도착하여 토지 구입을 서둘렀으나, 개항 예정지는 일본인들과 천주교회에서 사버렸기 때문에 도시 외곽 일본 영사관 건너편 땅 2에이커를 $51/은화(51엔)에 구입하였다. 그러나 아관파천으로 개항이 미뤄졌기 때문에 목포 선교부 개설도 또한 연기되었다.
서울에서 선교 준비를 하던 유진 벨은 1896년 2월에 레이놀즈와 함께 목포로 내려가서 머지않아 개항장으로 열리게 될 이곳에 선교지부를 개척하기 위해 토지를 매입하였다. 그러나 개항이 미루어지면서 목포지부 개설은 연기되었다. 나주에 선교지부를 개척할 것을 결의하였다. 나주가 목포에서도 가깝고 이 지역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선교지부로서 더욱 적합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1896년 5월, 장남 헨리 베너블이 태어났다.
【1987년, 나주 선교의 좌절】
1897년 3월에 어학선생 변창연과 함께 나주로 가서 전초기지로 사용할 주택을 마련하고자 했던 유진 벨은 시련에 봉착하였다. 조사 부부의 명의로 25불을 주고 주택을 구입하였는데, 처음에는 우호적이던 주민들이 외국인 선교사가 이곳에 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태도가 공격적으로 급변하였다. 주민들의 반대 이유는 외국인에 대한 편견과 거부감, 외래의 새로운 교리나 사상이 유입되는 것에 대한 저항감 때문이었다.
군산에 자리잡은 전위렴 목사와 유대모 의사는 전라북도에 전주와 군산이라는 두 개의 선교부가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로 위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고집하였다. 선교부의 기본 입장은 전라남도 목포를 염두에 두었으나 개항이 미뤄짐에 따라 나주를 고집하였다. 이렇게 하여 1896년 11월 선교회 소속 선교사 전원이 광주의 관찰사 윤웅렬과 교분도 나눌 겸 나주를 방문하고 전원이 개설의 뜻을 밝혔다.
1897년 3월부터 배유지 목사는 어학선생겸 조사 변창연 씨 가족을 이끌고 나주에 초가집 한 채를 사서 선교에 임하였다. 본래는 나주의 구 관찰사 건물을 구입하기 위하여 서재필을 통하여 교섭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나주는 단발령 이래로 고조되어 온 반-외국인 정서가 강한 곳으로서, 배유지 목사를 협박하고 선교를 방해하는 등 전남 선교의 거점으로 기대하였던 원래의 희망을 무너뜨리고말았다. 1897년 9월에 있었던 방문에서 유진 벨은 살해의 위협마저 당하였다. 이때 목포가 1897년 10월 1일에 개항되어. 나주는 잠정 보류하고, 목포에 선교지부를 개척하기로 결정하고, 그 책임을 유진 벨이 맡게 되었다.
【1898~1900년, 목포 선교를 시작하다】
목포의 개항은 진남포와 함께 1897년 10월 1일에 실시되었다. 배유지 목사는 곧바로 목포로 달려갔으며 12월경에 흥정과 예비계약을 마치고, 1898년 3월에 목포에 도착하여 대금을 지불하여 곧바로 사택건축에 착수하였다.
유진 벨은 1898년 3월에 목포로 내려가 정착준비를 하였다. 5월에는 목포에 임시거처가 마련되었고, 한국선교부에 새롭게 부임하는 의료선교사 오웬(오기원)이 배정되어 함께 목포 개척을 하였다. 1898년 9월 초순에 유진 벨은 서울에서의 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고 가족을 데리고 목포로 내려왔다.
목포에 자리잡은 배유지 목사는 축호전도, 도로변에 텐트를 설치하여 행인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장막전도, 그리고 집구경을 통한 전도 등으로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다. 11월에 오기원( Clement C. Owen) 의사가 도착하고 12월 12일은 사택이 완공(Miss Maria Barry 기념관)되었다.
1899년 1월, 맏딸 샬럿 위더스푼이 태어났다. 1899년에는 여성과 아동선교를 전담할 스트레퍼(Miss Fredirica Straeffer)양이 도착하였다. 목포에서 유진 벨은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충실히 따랐다. 유진 벨이 선교초기 목포에서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았던 선교는 오웬이 시작한 의료선교였다… 유진 벨은 의료사역이 선교의 본질을 사람들에게 분명히 보여줄 수 있으며 자신들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사역이라고 보았다. 이로 보건대, 의료사역은 개척지에서 복음이 뿌리내리는 데 유용하였으며 유진 벨의 선교에서 복음전도와 함께 선교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배유지 목사는 1899년 9월에 ‘4명이 세례받겠다고 신청하였으며, 지금까지의 죄를 끊고 예수를 믿겠노라고 작정하는 회중이 20여명에 이른다’라고 편지하였다.
1900년 3월 5일 목포 대리당회가 조직되어 30명을 문답하였으며, 6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8명은 학습교인으로 받아들이고, 3명의 유아세례를 베풀고 나머지 16명은 기다리게 하였다. 그리고 헌금 총액도 $10에 이르렀다. 5월 14일 제2차 대리당회를 개최하여 김윤수씨를 문답하였다.
【1901년, 첫 번째 부인 로티와 사별하다】
1901년에는 목포교회의 교인수가 50명에서 75명 정도로 늘어났으며, 설교를 두 번씩이나 할 정도였다. 배유지 목사는 1901년 4월 9일 화요일 밤에 전주지방으로 선교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4월 11일 목요일 저녁에 부인의 병환소식을 전주에서 전보로 접하고, 곧바로 군산으로 가서 배를 타고 목포로 가려고 하였는데, 군산에 도착해 보니 부인이 운명(급성 심장마비)했다는 전보가 도착해 있었다. 부인을 언더우드 목사의 집례로 서울 외국인 묘지(양화진)에 안장하고, 두 자녀(존, 샤롯)를 데리고 5월 미국으로 일시 귀국하였다.
미국으로 돌아간 1년 반 뒤인 1902년 12월에 목포에 다시 부임하였다. 그후 목포교회는 크게 성장하지 못했으며, 제자리걸음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이 기간에 이눌서 목사가 잠시 맡았다가 성서번역 위원으로 선발되어 서울로 감으로써 목포교회는 김윤수 집사가 이끌었다.
1902년 12월, 스트레퍼 선교사는 목포에 정착하여, 정명여학교 설립하였다. 1902~1903년 선교보고에서, 유진 벨은 목포에 남자학교와 여자학교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요청하였고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의료사역도 매우 절실히 요청된다고 보고하였다.
1903년 6월 28일에는 배유지 목사의 첫 번째 부인을 기념하는 200석 규모의 교회당(Lottie Witherspoon Bell Memorial Church)을 헌당하였다. 이 교회당의 건축비(2500냥) 가운데 4/5를 현지인이 부담하였다. 25명의 수세교인 대부분이 한 달에 5불미만의 돈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이들이 이러한 건축을 하였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헌신이며 자기부정의 삶이라고 극찬하였다. 이들을 이끌어 교회건축을 지도해 나간 김윤수 집사를 가리켜 “지금까지 보아온 중에 가장 열정적인 한국 그리스도인”이라고 평하면서 그의 신앙과 지도력을 칭찬하였다.
1903년, 배유지 사랑채에서 목포 영흥학교 설립하였다.
【목포의 선교의 한계성】
1) 목포의 인구가 인근 지역까지 포함하여 5,000여명인데, 그 가운데 일본인이 1,000여명이었다.
2) 개항지로서 외국과의 무역이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3) 처음부터 염려하던 식수공급이 원활하지 못했다.
4) 배유지 목사의 잦은 공무여행이었다. 5월에 2주간 서울에서 열리는 성서공의회 회의참석, 여름 동안의 장마로 인한 선교업무의 중단 9월 한달동안 선교회 연례 선교대회 등이었다.
5) 부인의 문화적 충격과 고립과 1896년 5월에 큰아이 헨리를 출산하고 1899년 1월 둘째 아이 샬롯트(Charlotte)가 태어나는 등 가정사에 매달리는 일이 많았다. 또한 부인의 죽음은 목포에 대한 염증을 느끼게 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찾게 하였다.
6) 1898년을 기점으로 외국인의 내륙거주가 허용되었다.
【광주 선교부 개설과 재혼(마가렛 휘태커 불)】
남장로교 선교회는 1904년 2월 목포에서 개최된 ‘전-선교회 성경협의회’에서 광주에 새로운 선교부를 개설할 것으로 합의하였으며, 배유지 목사와 오기원 의사에게 사전 답사를 의뢰하였다. 이렇게 하여 4월에는 김윤수 집사를 광주선교부 부지 매입 대리인으로 선정하여 56,000여 평의 땅을 $2,100에 매입하여 배유지 목사와 오기원 의사의 사택건축에 착수하였다.
배유지 목사는 한국에서의 선교를 위하여 결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군산의 부위렴(윌리엄 불, William Ford Bull) 선교사의 여동생인 마가렛 휘태커 불(Miss Margaret Wiaker Bull)과 5월 미국의 노포크(Norfolk, Virginia)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새색시와 함께 9월 목포로 돌아왔다.
1904년 12월 25일, 광주선교부 개설과 광주교회(현 광주제일교회) 설립하였다. 1904년 봄에 장로교 선교연회에서 광주선교부를 개설하기로 가결함에 따라 그 책임자로 피택되었다. 그해 12월 오웬과 함께 광주선교부 초대 선교사로 전임한 벨은 광주시 양림동에 선교부를 설치하고 12월 크리스마스를 맞아 그 축하예배를 자신의 사택 사랑방에서 집례함으로써 광주선교 역사의 첫장을 열었다. 이 모임은 1905년 1월부터 「기도회」 모임으로 발전하였고 점차 교인이 증가하자 북문안(北門內)교회(현 광주제일교회)를 설립, 6년 후인 1910년엔 교인수 5백명을 기록하였다.
그는 한국인 지도자들을 양성하여 스스로 교회를 이끌어 나가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1905년 2월과 3월에 선교지소를 돌면서 각 그룹의 리더들을 광주로 모이게 하여 따로 성경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능력있는 현지 지도자들을 발굴하고 또 지도력을 개발하였다.
“내가 오랫동안 확신해 오는 바는 우리 선교지에서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현지인들 자신의 힘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현지인 지도자들과 조력자들을 발굴하고 이들을 계발(啓發)하는 데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왔다.”
1905년 10월부터 배유지 목사는 광주 인근 지역의 전도와 사택건축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15일 건축이 완료되었다. 배유지 목사, 오기원 의사, 조사 변창연 그리고 김윤수 집사 가족이 12월 19일 목포를 떠나 12월 21일 광주의 새로운 일터에 도착하였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예배에 인근 주민들을 초청하는 안내문을 보내고, 직접 찾아다니면서 구두로 초청하였다.
1907년에는 평균 60여명이 꾸준히 예배를 드린다고 하였으나, 연말에 이르러 몰려드는 교인들을 수용하고, 또한 광주에서 주기적으로 개최하던 성경학교의 인원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교회를 확장하여야 했다. 그러나 1907년에는 정확하게 시기를 밝힐 수 없으나, 첫 번째 세례문답과 세례식이 거행되었으며 동시에 유년주일학교가 시작되었다.
【교파연합주의와 장로교 정통주의】
유진 벨은 1907년부터 1923년까지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서 조직신학과 성서학 강의를 하였다. 평양장신은 북장로교 선교부 지역에 있었지만 네 개의 서로 다른 장로교 선교부가 교수를 파송하여 신학교육을 하는 장로교 연합신학교였다. 유진 벨은 네 개의 장로교 선교부가 연합하고 일치하여 하나의 장로교회를 이룬 것은 한국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전통이라고 강조하였다.
“공의회[장로교공의회]에서는 선교부에 따라 표가 갈린 적이 없었다… 한 선교부와 다른 선교부 간에 분쟁이 있었던 적도 없었다. 현지인과 외국인 형제들 사이에서 분쟁이 있었던 적도 없었다… 우리는 장로교와 개혁교회 신앙의 근본적이며 역사적인 교리들의 근간 위에 조직되었다. 우리는 진심으로 연합을 믿는다. 온 나라를 통틀어 한국에 하나의 장로교회를 세운 것 외에 다른 일을 했다면 그것은 범죄행위였을 것이다.”
장로교간 연합뿐만 아니라 다른 교파들과의 연합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연합과 협력이라는 달콤한 열매만을 바라보면서, 바르지 못한 기초를 분별하지 못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복음에 대한 바른 신학이 없는 연합은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유진 벨의 보수적 신학의 뿌리는 장로교 정통주의였다. 그가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쳤던 신학의 주 내용이 칼뱅주의와 관련된 계약사상과 하나님의 절대주권, 예정론, 이신칭의와 성화의 구원론이었고, 전적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의 사상이 그의 신학 안에 흐르고 있었다.
【의병에 대한 배유지 선교사의 시각】
1908년, 배유지 선교사 사랑채에서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 출발한 후 정부로부터 각각 남녀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1908년에 모인 선교사 연례대회에서 배유지 목사는 ‘지역교회의 회중은 약간 증가세를 보였다. 이제는 125명에 일이르렀다. 이 가운데에서 25명은 금년에 문답하였으며, 18명은 요리문답 교인으로, 그리고 4명은 세례교인으로 받아들였다’라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1908년은 광주 인근에 의병활동이 전개되고, 특히 의병이 광주에 쳐들어온다는 소식 등으로 인하여 선교에 적잖은 지장을 초래하였다.
의병의 활동은 자연히 선교의 원활한 활동을 저해하였다. 따라서 광주 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은 의병에 대해서 하나같이 달갑지 않은 표현을 사용하였다. 배유지 목사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의병이라는 표현보다는 반도(reble), 산적(bandit), 불법자(outlaw) 등등의 이름을 사용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이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이다.”
‘나이도 많고 신실한 조사였던 김문삼(장성군 보생리 교회) 씨는 의병에 참여했다는 풍문만으로 한국 국인들에게 붙들려 정신을 잃도록 두들겨 맞았으며, 6주 이상이나 걸을 수 없었다’ 이로인하여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잠시 쉬었으며, 심지어는 교회를 끝까지 포기한 사람들도 많았다.
‘우리는 폭동이 빨리 끝나기를 참으로 바란다. 일부 무식한 자들과 그릇되게 인도된 사람들이 산적들과 불법자들과 합류하지만, 이 운동은 동포들과 국가에게 슬픔과 괴로움만 가져다 줄 뿐이다’
【1910년대 배유지 목사의 선교활동】
광주의 지역교회는 1909년 선교사 연례대회에서 ‘교회의 회중은 250명에서 300명에 이른다’고 보고하였다. 1910년 선교사 연례대회에서는 400명에 이른다고 보고한 다음에, 시내교회는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로 또다시 확장하였다고 하였다. 1911년 선교사 연례대회에서는 500명에 이른다고 보고하였다. 1911년 10월 15일, 전주에서 열린 전라노회 창립총회에서 부회장으로 피선되었다(당시 노회장은 한국인 김필수)
배유지 목사는 1912~1913년 안식년을 보낸 후, 1914년 제3회 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16년에는 광주의 지역교회(북문안교회)의 당회원을 이기풍 목사에게 넘겨주고 순회구역 선교에만 전념하였다. 1918년 5월, 모교 센터럴대학으로부터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19년, 둘째 부인과 사별하다(교통사고)】
1919년 3월, 둘째 부인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3월 26인 배유지 박사 부부, 노라복 목사, 목포의 크레인 등은 배유지 목사가 새롭게 구입한 차로 서울을 떠나서 광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배유지 목사가 운전하고 노라복(Robert Knox, 1880~1959) 목사는 운전석 옆좌석에 그리고 배유지 목사의 부인과 크레인(Paul S. Crane, 1889~1919) 목사는 뒷좌석에 앉았다. 차가 수원을 지나 병점에 도착하여 기차 건널목에 이르렀으며, 기차의 진입을 확인한 다음에 차의 앞부분이 건널목을 건너고 있을 때 갑자기 기차가 들이닥쳐서 차의 뒷부분을 받쳤다. 배유지 목사는 차 밖으로 튕겨져 나왔으며, 노라복 목사는 눈을 다쳤으며, 뒷자리에 앉았던 배유지 목사의 부인과 크레인 목사는 현장에서 즉사하였다.”
이 사고로 인하여 배유지 목사는 ‘부인과 동료를 죽인’ 죄목으로 재판정에까지 섰으나, 무죄로 풀려났다. 이렇게 하여 배유지 목사는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아내의 재산을 정리하고, 자녀들의 교육을 마무리하였다. 그동안 모교인 켄터키주 중앙대학교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 번째 결혼, 그리고 생의 마지막】
1921년 9월 15일, 다시 한국으로 나온 배유지 목사는 세 번째 부인인 동료 여자선교사 다이샤트(Julia Dysart, 배주리아ㆍ배주야, 1872.10.16~1952.1.26)와 결혼하였다.
1922년 3월, 한국에 복귀하였는데, 그해 6월 11일, 큰딸 샬롯트가 교육선교사 린톤(William A. Linton, 한남대학교 설립자)과 결혼하는 것을 보는 기쁨을 갖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실수로 두 번째 아내가 죽었다는 자책감을 늘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는 활발한 선교활동보다는 조용한 정책입안, 자문 등으로 지도자적 위치를 지키다가, 1925년 9월 28일 광주 양림동 사택에서 갑작스럽게 죽었다.
광주선교부는 ‘Resolution of the Korean Mission on the Death of Rev. Dr. Eugene Bell’이라는 애도사를 발표하였다. 광주 호남신학대학교 교정에 자리한 그의 묘와 그가 1908년에 시작한 수피아여학교 교정에 위치한 배유지 목사를 기념하는 예배당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배유지 목사의 큰딸 샬롯트는 린톤 선교사에게 결혼하였다. 사위인 린톤은 대전 한남대학교의 전신인 대전대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그 자녀인 인도아(Dwight Linton), 인휴(Hugn M. Linton)는 한국에서 선교활동에 임하였으며, 그의 외손자인 요한(John Linton)은 지금도 연세대 의대 부속병원 외국인 진료담당으로 일하고 있다.
부인 줄리아는 광주에서 여성교육에 매진하다가, 1940년 11월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철수할 때 귀국하여 은퇴하였다. 그녀는 플로리다와 노스캐롤라이나 몬트리트에서 여생을 보내다, 1952년 1월 애슈빌(Asheville)에서 별세하여 블랙마운틴 마운틴뷰(Mountain View)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