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순 [金應珣, 1891~1958]

김응순 [金應珣, 1891~1958]

김응순 목사 사진

장로교 목사, 장로회 제31회 총회장


김응순(金應珣, 1891~1958)은 1891년 10월 17일, 황해도 장연군 송천리에서 출생하였다. 1910년 경성 제1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1912년부터 황해도 장연군에서 사립보통학교 교사로 8년간 근무했다.

1920년 7월, 대한적십자사 청년의용단에 가입한 뒤, 단원 모집과 군자금 모금,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간한 〈독립신문〉 배포 등의 활동을 펼쳤다. (의용단은 장연 출신의 장규섭이 황해도 일대에서 대한적십자회 운동을 기반으로 조직하여 상하이에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연계를 꾀한 조직이었다.)

1921년 3월,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대한적십자사와 의용단 조직사건에 연루되어 황해도 장연에서 일제경찰에 검거되었다. 그해 6월 28일, 대한적십자사와 의용단 조직사건으로 해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받았다(동아일보 1921년 7월 3일). 공훈전자사료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김응순의 판결문은 대정 10년(1921년) 10월 15일로 되어 있다.


출옥 후 1923년부터 황해도 장연군 송천교회 전도사로 활동하다가 1927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제21회)하고 목사안수를 받았고, 황해도 봉산군 흥수원교회를 담임하였다.

1935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회록 서기를 맡았고, 1936년 6월 14일에는 해주의 제1교회에 부임하여 시무를 하였다. 1937년에는 황해노회장에 피선되었다.

1938년 4월 29일, 황해도 내 기독교도의 ‘御眞影拜賀式’(어진영배하식)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5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한창일 즈음, 친일적인 단체인 평양 기독교친목회의 오문환의 요청으로 이승길ㆍ장운경 목사 등과 함께 일본을 방문하였다. 방문의 목적은 신사참배가 한국교회의 주장처럼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아무튼 그후 장로교 총회는 신사참배안을 가결시켰다. [김응순은 평양기독교친목회 회원이었는데, 이 모임은 개신교 목회자들을 대거 친일 활동에 끌어들인 평양 출신의 교육자이자 언론인 오문환이 설립한 단체였다.

1939년 9월, 장로회 총회 총대로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평의원을 맡았다.


1941년 1월 22일, 〈장로회보〉에 ‘신체제하에 신도(信徒)’라는 설교문을 게재하였다.

“신체제의 근본 방침은 근위(近衛) 수상의 성명한 것처럼 ‘팔굉을 일우로 하는 조국의 대정신’에 기하야 세계 평화의 확립을 초래하는 사(事)로써 근본으로 하되, 선(先)히 황국을 핵심으로 하야 일(日), 만(滿), 지(支)의 강고한 결합을 근간으로 하는 대동아의 신질서를 건설하는 데 있다. 그 때문에 고도 국방국가의 건설, 외교의 대전환, 국민조직의 재편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중략)

신체제의 지도 이념의 일은 공(公)을 선히 하고 사(私)를 후에 하는, 즉 멸사봉공이다. 이 정신이 아니면 아니 된다. 이 정신이야말로 참 기독교 정신에 일치된다. 곧 희생봉사의 정신인 것이다.(중략) 고로 금번 신체제 출발의 호기회에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용력하여 국체와 모순이 없기를 바란다.”


1942년 2월,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연맹 주최 시국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하였으며, 9월 20일에는 장로회 헌납 해군기 명명식에 참석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1회 총회장에 피선되었고, 국민총력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 연맹 이사장을 겸임했다. 그는 총회장에 당선된 뒤 교파 합동, 규칙 개정, 경신숭조(敬神崇祖)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내세우고, 일본 정신에 기초한 일본적 기독교를 새롭게 산출하여 수립하도록 힘쓰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김응순이 총회장으로 피선된 1942년 총회록이 일본어로 기록되고 총회임원의 이름도 창씨된 일본명으로 기록하였다. [창씨개명 : 新森一雄, 니이모리 가즈오]

그해 11월 12일, 정인과ㆍ전필순 등과 함께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연맹 이사장으로서 총회 연맹 주최로 ‘황군 환자용 자동차 3대 헌납식’을 개최하고 조선신궁에 참배하였다. 그리고 11월 17일부터 12월 1일까지 일본 기독교단 제1회 총회 축하사절단을 맡아 김종대 목사와 함께 일본에 건너가 이세신궁, 야스쿠니 신사, 메이지 신궁 등을 참배하고 돌아왔다.

1943년 2월 11일부터 12일까지 경성 승동교회에서 장로회 총회 연맹 이사장으로서 일본정신 체득을 목적으로 한 ‘노회 대표자 연성회’를 개최하고, 참석자들을 인솔하여 조선신궁을 참배하였다.

1943년 3월, 그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전시포교 지침 선언을 반포했다. 그리고 징병제도 취지를 철저히 주지시키기 위해 전국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 여자대표자 연성회를 경성대화숙에서 개최하고 총회장으로서 훈시를 했으며, ‘일본정신과 기독교의 관계’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그해 4월에는 총회 연맹 이사장으로서 각 노회 이사장에게 공문을 보내 귀금속 헌납을 독려했다.

1943년 5월 임시총회를 소집하여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를 해산하고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규칙을 채택하여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개편했다. 그해 11월에는 이동욱, 갈홍기, 채필근 등과 함께 조선 종교단체 전시 보국회 기독교 위원(장로교)으로 활동했다.

1945년 5월 조선 전시종교보국회 주최 지방순회 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했으며, 그해 7월 개신교 교단을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폐합할 때 조선교단의 고문 겸 황해도교구장을 맡았다.


해방이 되었을 때 북한에서 강양욱 목사가 이끈 조선기독교연맹 조직에 가담하여 부 총회장까지 역임을 하는 등 북한 공산체제에 적극 협력하는 등 그의 생애에 있어서 두 번씩이나 변절하는 기록을 안고 다니게 됐다.

이후 6ㆍ25전쟁 중이던 1951년 1월, 월남하여 인천에서 목회하였다. 그는 1952년 10월 17일에 인천의 보합교회를 설립하였고 인천소년교도소 교무과장을 지냈다. 또한 인천의 보합공민학교 및 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재직했다. 휴전이 성립된 후 대전으로 이주하여 1954년 대전야간신학교(대전신학교 전신)를 설립하였다. 그는 1958년 1월 5일 별세하였다고 한다.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나 2010년 서훈이 취소되었다.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 360번에 안장되어 있었으나 서훈 취소로 2011년 10월 31일에 이장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교회 재산 일본에 바친 목사… 한국 정부는 상 줬다” [오마이뉴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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