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기 제1권] 서울 3년 – 장도빈 선생과의 인연
장도빈 선생과의 인연 3ㆍ1 독립운동에서의 「피」의 댓가로 위선1 『제등총독』의 『문화정치』가 선언되었다. 그것이 사탕발림의 회유정책이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래도 『우리사회』에서는 『민족주의』가 어였하게 외쳐지고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한국말 일간신문이 발간되고 『개벽』 잡지가 …
장도빈 선생과의 인연 3ㆍ1 독립운동에서의 「피」의 댓가로 위선1 『제등총독』의 『문화정치』가 선언되었다. 그것이 사탕발림의 회유정책이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래도 『우리사회』에서는 『민족주의』가 어였하게 외쳐지고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한국말 일간신문이 발간되고 『개벽』 잡지가 …
인쇄된 첫 글 당시 백부님은 서울 견지동에 한성도서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취체역1 겸 전무로 출판사업에 전념하셨다. 「서울」이란 월간 종합잡지, 「학생계」란 학생을 위한 월간지도 내셨다. 「학생계」 편집은 그 때 새파란 청년인 오천석2 씨가 …
중앙YMCA 『만세』 이후 3ㆍ1운동 33인과 주요 관계자들이 감옥에 가고 그 뒤에 남아 학생들과 민중과 청년들에게 이 운동을 『의식화』시킨 본산이 서울 중앙 YMCA였다고 하겠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민족의식을 키우고 민족문화를 발굴하고 …
1920년대의 서울풍경 예정대로 서울에 닿았다. 여름철이라 사람들은 모두 풀먹여 빳빳하게 대림질한 하얀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다닌다. 고이적삼까지도 구김새 없는 모시로 입었다. 말쑥하게 땟벗이 한 문화족속임에는 틀림없었지만 어딘지 매끄럽고 약해 보였다. …
웅기서 서울로 때는 3ㆍ1운동 다음해 – 나는 그때 웅기 금융조합에 서기로 있었다. 나이는 스무 살. 웅기서 한 오리 떨어진 해변에 웅상이란 동네가 있다. 일찍부터 기독교촌이었다. 거기 출신인 송창근1 씨가 서울 …
외투리 풋내기도 결혼하자마자 나는 회령군청에서 웅기금융조합으로 전직했다. 그 때 웅기에는 은행이 없었기에 금융조합에서 은행업무도 얼마 맡아 상인들 편리를 봐주곤 했다. 그것이 3ㆍ1운동 다음 해였지만 웅기에는 교회가 너무 약했고 경찰이 너무 …
장가가던 이야기 나이 열일곱 정도 밖에 안되는 소년인데도 서기(주사) 어른들이 놀러나갈 때면 나를 끌고 가는 것이었다. 회령읍에서도 제일 찬란한 거리가 일인들이 경영하는 공창가였다. 군청 어른들은 나를 데리고 간다. 기가 약한 …
회령군청(16~18세) 향동학교 시절에는 열렬한 민족지사였던 김희영 선생이 그동안에 마음을 돌려 먹고 보통문관 시험을 치뤄 합격과 함께 판임관이 됐다. 정복 정모에 한줄기 금줄이 번쩍인다. 옆구리에 칼까지 찼다. 내가 농업학교 졸업할 무렵 …
회령간이 농업학교(13~16세) 한 달쯤 집에 있었을까, 외사촌 형님이 『회령 간이농업학교』에 입학시킨다고 또 데리러 왔다. 나는 따라 나섰다. 삼월이라 눈이 녹으며 얼며 한다. 입학시험 날 시간에 닿기 위해 사흘 전에 떠났다. …
고건원 보통학교 열두 살 때 초가을이었다. 외사촌 형님 채규홍 씨가 우리 집에 들러서 고건원에 공립 보통학교가 생기고 향동학교에는 폐교령이 내렸다고 전해주었다. 그리고 보통학교에 다녀서 거기를 졸업하는 게 유리하다고 했다. 다짜고짜 …